어린 시절. 나의 출생과 관련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내리 3명의 딸을 낳은 어머니는 마지막 4번째 만은 아들이리라 믿었고, 임신한 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들이라고 했지만, 아들이어야만 했던 4번째 출산은 역시 딸이었고, 그래서 출산을 한 직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산후조리를 위해 며칠간 입원을 하라 했지만, 또다시 딸인 마당에 입원을 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아 바로 아기를 데리고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포대기에 싸인 신생아를 먼발치로 밀어놓고는 누워서 그렇게도 서러워했더랬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아기가 울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안 나더라, 혹시 그새 아기가 죽은 것은 아닌지 문득 불안한 마음에 들여다보니, 아기가 가만가만 잠들어 있더라.
그 이후로도 너는, 이렇게 울지 않는 아기가 어디 있나 싶게,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먹고 자고만 하더라.
네가 아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니...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내가 얼마나 착하고, 잘 참는 아이였는지를 설명하고 싶을 때마다 수십 번도 넘게 위의 이야기로 말문을 열곤 하셨다.
네 번째 딸로 태어난 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건만, 나의 출생은 그렇게 미안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백일 사진도, 돌 사진도 없다.
친구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였는지를 백일사진이나, 돌사진을 통해 증명해 보이려 할 때마다, 딱히 내놓을 만한 번듯한 사진이 없던 나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한 번도 부모님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 나는 사진을 찍어주지 않았느냐고.
태어난 직후야 그렇다 쳐도, 백일, 돌이 될 때까지도 그렇게 못마땅했던 거냐고, 그래서 기념할 필요조차 없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태어난 순간부터가 미안함이었던 탓이었는지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묻지 않았으니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부모님이셨겠지만, 서운함과 서러움은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 기념조차 없었던 나에게 이후로도 생일은 그다지 기념할 만한 날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챙겨준 생일 미역국을 받아본 해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보아도 손가락이 남을 만큼인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한 이후에도 나는 나의 생일 즈음이면, 신경이 예민해진다. 나의 친한 친구가 나의 생일을 기억해 주는지, 사귀던 남자 친구가 얼마나 축하해 주는지, 결혼을 한 이후에는 남편이 얼마나 준비를 하였는지, 출산을 하고, 자녀들이 큰 이후에는 아이들이 엄마의 생일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주는지...
만약 이러한 나의 기대가 무너지게 되면, 나는 또다시 끝도 없는 우울과 분노, 슬픔에 허우적거리게 되곤 하였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이면, 자주 도망가고 싶어진다.
새 학교에 입학하거나, 신학기가 시작되는 첫 등교, 교사가 되고 나서는 새로운 학교에 발령받아 가게 되는 첫 출근, 새로이 시작되는 모임의 첫 만남,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두려움은 조금 더 깊은 데서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미안해야만 했던 나는,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아야 그나마 존재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환영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 역시 자리 잡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얼마나 잘 참는 사람인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나 자신을 혹사시키는 일들을 기꺼이 자처하는 순간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