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상
3개월 만의 복귀. 한국에서의 복잡다단한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완연히 여기가 나의 집이다. 현재로서는.
언제부턴가 ‘정착’보다는 ‘유목’인의 삶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정착의 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일까.
짐을 싸고 푸는 일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앞으로의 언젠가를 위한 다량의 무언가를 챙기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의 여행가방에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이 담겨졌다. 끝까지 포기가 잘 안 되는, 때로는 그 욕망이 잦아들기보다 오히려 불쑥 커질 때도 있는 그 무엇 중에 하나가 책이다. 컨테이너나 국제소포로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 너무 어렵고 비싼 나라.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거의 인편을 통해 받고 싶은 물건을 부탁하곤 한다. 처음에 이곳에 올 때 내가 가져올 수 있는 무게는 30kg뿐이었다. 옷도 거의 가져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도 가방에는 십 여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 이브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이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인 아담(톰 히들스턴)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짐을 싸던 장면이 떠오른다. 집안에 가득한 수많은 책들 중에 가져갈 책을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이 영화를 본지 수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다시 돌아와서 2주 동안도 온전한 일상의 회복은 어려웠다. 도착해서 또다시 여행 짐을 싸야 했고 이후로도 며칠 단위로 짐을 싸고 풀었다.
2주가 지난 후 주변이 조용해졌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며칠 동안은 청소만 했다. 청소와 정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첫 관문처럼 느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청소와 정리로 며칠을 보냈고 손가락 관절이 아팠었다. 다시 돌아와 청소하며 느끼는 손가락의 아릿한 통증이 괜히 반가웠다.
집 안 청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쯤 오랜만에 외출.
천천히 걷다가 길가에 한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면서 비로소 일상을 회복한 느낌을 가졌다. 하늘은 여전히 파랬고 햇살은 눈부셨다. 매일 다른 선셋도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