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란 소설, 제목이 왠지 끌렸다. 이십 대의 어느 겨울, “음악회를 좋아하세요...”라며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던 한 남자의 말과 닮아서였으리라. 젊은 시절 난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이었다. 음악시험을 치르기 위해 들었던 기본적인 클래식 정도만 알았을 뿐. 그는 내 약점을 제대로 공략한 것이었다. 나와 많이 다른 그와 만나면서 따분하고 어려웠던 고전 음악의 세계에 들어섰다. 소설 제목 뒤에 붙은 문장부호 또한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인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의미심장한 점 세 개의 말줄임표, 과연 작가는 무엇을 더 말하려다 생략한 것일까. 궁금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떨리는 음성으로 내게 전화했을 그 남자도 아마 속엣말을 다 못하고 하고픈 말을 삼켰을 것이다. 음악회에서의 첫 데이트를 시작으로 그 남자와 지금까지 한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이 연애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서른아홉의 실내장식가인 폴은 첫 남편과 이혼 후 지금은 로제라는 사십 대 남자와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사귐이 육 년째 접어들자 남자는 구속과 책임을 싫어하며 젊은 여자와 쾌락의 밤을 보내며 점차 폴을 외롭게 한다. 그러던 중 폴은 일 때문에 방문했던 미국인 부인 집에서 시몽이란 잘 생긴 청년을 만난다. 안정감 있고 교양 있는 폴에게 첫눈에 반한 시몽은 열네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소설은 오래되어 익숙한 연인과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연하남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년 여인의 복잡한 심리와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오랜만에 잃어버렸던 연애감정을 느끼며 내 가슴은 달떴다. 맛난 음식을 아껴가며 먹듯, 소설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장면과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상상하고 음미했다. 내 마음의 현도 폴의 마음을 따라 고음과 저음을 오가며 요동했다.
‘프랑스 문단의 매력적인 작은 괴물’이라 불린 사강은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소르본 대학을 중퇴한 그녀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쓴 것은 이십 대 중반, 2004년 일흔에 그녀가 죽었을 때 언론들은 낭비와 알코올과 연애와 섹스와 속도와 도박과 약물에 ‘중독’된 삶이 그녀의 문학을 압도한 격이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자서전 <내 최고의 추억과 더불어>에서 그녀는 자신의 글쓰기가 삶의 제약에 대한 복수였다고,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적인 도덕과 관습 안에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 천재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거의 이 년마다 작품을 꾸준히 썼다고 하니 작가로서 성실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녀 간의 심리 전개를 관찰하듯 섬세하고 담담하게 묘사한 그녀의 작품 속에는 그녀가 경험하고 고민한 질문에 대한 이해가 들어있으니, 책을 읽으며 내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내게 많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난 사강, 그녀가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떠올렸을 브람스의 곡이 궁금했다. 힌트를 소설 문장 속에서 찾았다. “시몽에겐 브람스의 콘체르토가 조금 비장하게, 때로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여겨졌다. 바이올린 한 대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누르고 솟아올라 찢어질 듯한 고음으로 필사적으로 떨더니 이윽고 저음으로 내려와서는 즉각 멜로디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며 다른 소리들과 뒤섞였다.”(p.61) 이 문장으로 미루어보아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였다. 브람스의 하나밖에 없다는 바이올린 협주곡, 책을 읽는 내내 이 음악과 함께 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시몽의 초대에 응한 폴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음악을 인연으로 이어진 우리 부부의 추억도 떠올렸다. 이렇게 음악까지 함께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주는 덤이 아닐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수습 변호사인 시몽이 폴에게 어떤 재판과정의 변론을 흉내 내며 한 말이다. 많은 드라마에서 패러디가 되었다는 유명한 그 문장.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p.44)
멋지다. 나는 과연 이 문장에서 자유로운가. 무죄인가. 사랑과 행복을 꿈꾸며 협주곡과 같은 결혼을 예상했지만 결혼은 우아한 음악회가 아니었다. 부부란 약속으로 묶인 나와 남편에게 이제 청춘의 열정은 없다. 오랜 시간의 힘이 우리 부부의 설렘을 낡은 책처럼 누렇게 변색시켰다. 열정과 사랑 따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하느라 가슴은 없고 머리로만 살던 나에게 이 문장은 새삼 아련한 질문을 던진다.
연애소설인 이 책은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과연 남녀 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습과 관념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사강은 몇십 년 전에 벌써 사회적인 편견에 대한 도발을 시도한 것이리라.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 폴이 자신은 늙었다고 말하는 장면에 연민을 느낀다. 나 또한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이미 내가 쌓아놓은 세월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기에. 내 선택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기에.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연애 감정을 다시 느끼는 은밀한 즐거움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신중한 선택을 했음에도 불편한 결말, 그 반전에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남자들이란...’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랜만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며 음악이란 가느다란 인연의 끈으로 만난 남편을 음악회에 초대해 보리라. 시몽을 흉내 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