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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장미 Jul 25. 2024

고통에 무관심으로 침묵하는 나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2024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나서 참 불편했다. 제목은 사소한 것들이라고 했지만 책의 울림은 묵직했다. 표지에는 눈 덮인 뾰족한 성당 첨탑 위로 까마귀가 날고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몸을 풀었다는 첫 문단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전개될 것을 암시했지만, 목청을 높이지 않은 담담한 표현과 경구와도 같은 문장들에 감동했다. 따뜻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주인공 펄롱이 크리스마스 전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 들어서며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암시의 문장처럼. 그랬다. 나도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을 만나러 가게 될 줄이야. 나의 근원이 되는 문제, 그동안 덮어두고 꺼내지 않았던 감정들, 용기 내지 못해 둘둘 말아 넣어 둔 이불처럼 구겨진 내 기억을 다시 꺼내야만 했으니까.

   클레어 키건은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 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이 소설을 썼단다. 그래서 서문에서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고 했고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발췌해 실었다.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뿐 아니라 정치학까지 전공했다. 그런 이력이 이런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이십여 년 동안 활동했지만 겨우 네 권의 책만을 출간했는데 모든 책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며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굉장히 놀랍게 읽었던 천명관의 소설 <고래> 또한 이 상의 후보였고, 한강의 작품은 부커상을 수상했기에 더욱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이 책은 어렵게 쌓아 올린 자신의 모든 것을 한순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선택을 앞두고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 펄롱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난 첫 문단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번역의 문제인가 내 이해 수준이 문제인가 하면서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옮긴이의 글을 보니 작가는 첫 문단의 번역에 대한 조언을 했단다.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는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첫 문단을 몇 번 읽어도 그녀의 그런 의도를 담은 문장들이 내게는 좀처럼 잘 다가오지는 않았다.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는 것 어렵다. 하지만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질 않으니”(p.41), 이런 문장, 어떻게 이런 멋진 표현을! 공감이 가는 이 문장은 언젠가 꼭 인용해 보리라 생각하면서 밑줄을 그었다. 

   펄롱은 사생아다. 그의 엄마가 십 대에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하여 그를 낳았다. 미시즈 윌슨은 그녀를 해고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거두어 주었고 펄롱에게 관심도 가지며 글도 가르쳤다. 펄롱이 열두 살에 엄마는 일을 하다가 뇌출혈로 죽지만, 그가 아이린과 약혼하자 자리 잡는 데 쓰라고 미시즈 윌슨은 몇 천 파운드의 돈도 주었다. 펄롱은 결혼해 다섯 아이를 두고 있었다. 가장 더러움을 타는 석탄을 다루는 일을 했지만 일꾼들도 두고 일머리가 있고 성실했다. 누구와도 척지지 않고 잘 지낸다고 정평이 난 인물이다. 아내를 닮은 다섯 딸들도 학교에서 장래성을 보였기에 그는 딸들을 부양하는데 집중하며 살았다. 가끔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진한 기쁨을 느꼈다. 가끔 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주 거래처인 수녀원에 일찍 배달을 갔다가 석탄광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된다. 비참한 모습의 어린 소녀가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녀의 어린 아기를 몇 주째 못 보았다면서. 그녀 어머니와 같은 처지의 이름마저 같은 소녀 세라. 어쩌면 자신도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기인 자신의 처지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소녀의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 그리곤 그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아내 아이린은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p.55)라고 말한다.

   그녀의 냉정할 수 있는 말은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무정했다. 그저 결혼해서는 내 가정의 울타리를 지키기만도 벅찼으니까. 그래서일까 빠듯한 살림살이를 하는 아이린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어렵게 자랐지만 자신은 운이 좋다는 펄롱의 말 또한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난 운이 좋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살아왔다. 특히 낳아준 부모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6.25 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 아버지, 총부리를 겨누는 극한 상황을 겪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난과 폭력과 군생활의 권위에 절대복종해야 했던 아버지의 인생을. 배우지 못해 글도 더듬거리며 읽고 삐둘빼둘한 글씨체의 무식한 엄마도. 그들의 노력의 대가로 내가 누리고 살았건만. 가난한 농사꾼의 맏이로 직업군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말년 병상에서 자신은 하기 싫은 일만 하고 살았다고 아픈 말을 쏟았다. 아버지의 생명이 끝나가는 순간에야 속마음을 알게 되다니. 왜 나는 나날의 은총을 모르고,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이었을까?(p.111)

  펄롱은 자신의 딸들이 어른이 되어 남자들의 세계로 나가는 상상을 하면서 딸들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을 볼 때 긴장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아마도 자신의 엄마처럼 될 수도 있다는 염려에 조심스러웠으리라. 세상에는 모든 것을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그는 알았다.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긴 줄을, 술주정뱅이, 혹독한 시절의 아일랜드를 떠나 이민을 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난 편견으로 그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세상에는 그런 헤픈 여자들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수녀원에 수용된 미혼모들 정말 운이 나빴기에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기에 거기에 왔을 수도 있었다는 것. 아무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는 열악한 환경이 그들을 거기로 가도록 만들었을 수도. 세상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을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간다. 지금의 나는 운이 좋았기에 받은 것이 많았기에. 그러므로 펄롱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상처가 별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정말 불편한 진실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펄롱과 아내가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이 나온다. 내게도 초등학교 3학년 전방 관사에 살 때로 기억한다. 주변엔 친구도 아무도 없는 그런 곳이었는데 크리스마스 즈음 아버지는 <어깨동무>라는 잡지를 사 오셨다. 얼마나 좋았던지 난 책을 가슴에 껴안고 깡충깡충 한참을 뛰었다. 그때 그 선물의 기쁨은 지금도 떠오를 정도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책상 위에 벽돌 두께의 대국어사전을 남겨주셨다. 아버지의 손글씨가 적혀있다. 늙은 나이에 아버지는 거금을 주고 왜 이런 책을 준비하셨을까.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청년같이 배움에 열심이었던 아버지, 그러나 무뚝뚝하고 권위적이고 무서운 아버지로만 여기고 거리를 두었다. 겉으로는 순종했지만 속마음은 반항이 많았었던 내 모습을 직면한다. 

   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은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평생에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 부분이 기독교인 인 나게 너무나 불편했던 것인가. 내 연약한 믿음과 행동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직시하기가 힘들어서. 펄롱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지만 세라를 데리고 나오며 지금껏 이런 행복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고, 미시즈 윌슨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친절을, 어떻게 자신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을 생각했다. 그것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기에 지금 자신이 손을 잡고 나가는 이 소녀가 바로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는.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p.53) 노인이 했던 말처럼 결국 펄롱은 미시즈 윌슨의 사랑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고 선택했다. 이 소설은 너무나 운이 없는 연약한 소녀들, 그러나 깨끗한 세탁물로 대변되는 유익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무관심으로 침묵하는 나에게 말한다. 가식을 벗으라고. 나의 부모와 신앙,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온 두 기둥이다. 하지만 소중한 줄 몰랐다. 이제는 참회록을 써야 할 것만 같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감동을 넘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소한 것부터 마음을 쓰고 분별해갈 때 세상은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한다는, 작가의 주제가 선명하다. 이 책은 사회적인 문제를 잔잔하나 완성도 높은 문학작품으로, 마치 시와 같은 구조로 울림을 주기에 내겐 감동을 넘어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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