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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장미 Oct 24. 2024

부러운 남의 남편

-그때 그 순간


   몇 년 전 봄이 시작되는 3월, 난 모처럼 옷을 차려입고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도착한 곳은 강남에 위치한 한 예식장, 동창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 동창 모임 중 첫 혼사였다. 난 자리를 잡고서 친구들이 오길 기다렸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끔했다. 가운데 놓인 크리스털 꽃병에는 흰색 금어초가 우아한 자태로 향기를 뿜었고, 빙 둘러가며 준비된 식기와 유리잔들은 조명을 받아 빛났다. 식장은 곳곳에 장식된 많은 꽃들로 마치 화원 속에 있는 듯 향기가 가득했다. 속속 도착한 동창들과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서울 변두리 동네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인연의 소녀들, 우리는 결혼 후 각자 바쁘게 생활하느라 자주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다시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양가 어머니가 식장 중앙에 마련된 꽃으로 장식된 길에 섰다. 동창의 얼굴엔 큰아들을 장가보내는 긴장된 마음이 묻어났다. 함께 맞춰 입은 듯 고운 한복 차림의 그녀들은 단상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 떨리는 손으로 준비된 양초에 불을 밝혔다. 신랑 신부가 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리. 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박수를 보냈다. 우리 아이들은 언제나 자기 짝을 만날까 하면서. 신랑은 대학생 때 만난 여자 친구와 사귐이 결혼까지 이어졌단다. 아마도 친구들과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잘 유지해 가는 엄마처럼, 그 아들도 엄마를 닮아 정이 많고 속이 깊어 보였다. 그러니 자신의 짝을 찾아 긴 시간 사랑을 잘 쌓아가며 인생의 반려자로 선택했으리라. 얼마나 대견할까.

   뒤이어 앳된 신랑이 성큼성큼 입장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젊은이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리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한 떨기 고운 꽃 같았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 얼굴이 조명 속에서 돋보였다. 하지만 난 애지중지 키웠을

딸을 떠나보내는 신부 아버지의 아쉬움이 담긴 표정이, 이제는 그 얼굴이 더욱더 눈에 들어왔다. 예전엔 알 수 없었던 내 부모의 마음을 느끼면서 울컥했다. 주례는 대학 때 은사분이 맡아주셨고 앞으로 결혼생활에 꼭 필요한 귀한 말씀을 해주셨다. 신랑 신부는 많은 하객들 앞에서 혼인 서약을 했다. 신랑의 확신에 찬, 쩌렁쩌렁한 대답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도 사람의 축복 위에 신의 은총을 빌어주면서.

   장가보내기까지 동창의 수고를 생각하다 수십 년 전 나의 결혼식도 떠올렸다. 예식장에서 목사님의 긴 주례로 치른 결혼식. 나는 마냥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 는 말씀만 가슴에 담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내 몸처럼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정한 의미도 잘 모르면서 나는 목사님의 질문에 “네”라고 서약했었지. 그때 나는 결혼생활과 세상을 얼마나 만만하게 보았던가. 결혼의 시간은 철없던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결혼이란 한 번의 바람에도 흔들릴 수 있는 연약한 것임을,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산다는 것 또 자녀를 키운다는 것의 의미를, 결혼이란 여정은 나를 비우려 노력해야만 가능한 선교지와 같은 것임을.

   결혼 후 그녀와 나는 가까운 동네에 살게 되었다. 나는 5층 꼭대기 작은 아파트에서, 그녀는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맏며느리인 그녀는 시댁 가까이 시동생들과 또 시누이까지 있었다. 대소사를 챙기며 사느라 신경 써야 할 일들로 마음고생이 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가끔 만나면 차분하니 우리 동창 모임을 살뜰하게 챙겼다. 보이지 않는 손 같은 존재, 아마도 맏며느리의 역할과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의 자리를 소리 나지 않게 지키면서 배려가 저절로 몸에 익었으리라. 자신의 자리는 좁히며 인내란 글자를 몸속 깊이깊이 새기면서. 그래서 갑상선이란 병도 얻지 않았을까. 나처럼.

   주례 말씀이 끝나고 신랑은 ‘허니’라는 노래에 맞춰 사촌들과 준비한 춤을 췄다. 신부에게 변치 않을 사랑의 마음을 바쳤고 분위기는 흥겨워졌다. 어느덧 예식은 끝이 나고 양가 부모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왔다. 먼저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신랑의 아버지, 동창의 남편이 마이크를 잡았다. 뒷자리에 앉아서였을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하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조곤조곤 이어갔다. 그리곤 자신도 노래를 한 곡 부르겠단다. 노래 제목은 ‘천 년을 빌려준다면’이란 트로트라고. 사랑의 노래가 끝나자 갑자기 “미현아, 사랑한다~~” 식장이 떠나가도록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끈한 아들의 결혼 잔칫상에 숟가락을 떡하니 얹은 것이다. 한 걸음 뒤에 서있던 동창도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곧 양팔로 하트를 만들며 남편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미소가 빛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체증이 쑥 내려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청첩장을 받을 때면, 그 결혼식이 떠오른다. 친구 남편의 용기와 그녀의 행복한 표정이. 남편의 치밀한 계획이었던지, 아니면 흥겨운 분위기에서 그동안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한 돌발 행동이었던지 간에,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한 사랑고백은 이제 막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자식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같았다. 따스한 햇살뿐 아니라 폭풍우가 치던 긴 결혼생활을 함께 한 중년부부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평소에 아내의 수고를 깨닫고 고마움을 가슴 한 편에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큰 자리에서 대담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아들 또한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가슴에 소중히 담았으리라.

   그날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아내들은 나처럼 감동을 받았지만 남편들은 달랐단다. 동창의 남편을 배신자라며 속상해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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