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라 Jan 20. 2021

사람, 이야기

사랑한다는 고통

사랑은 고통이다.


기본증명서,

각 동의 행정복지센터에 가거나, 심지어 인터넷으로 집에서도 발급받을 수 있는

가장 건조한 문서


그 문서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사망'.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 앞에, 故가 처음으로 놓여 있었던 때

그리고 이제 그 건조한 행정 서류에서 그 이름의 뒤에 '사망' 두 글자가 덧붙여져 있었을 때


그 글자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운 것인지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하고 살았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대체 불가능한 존재의 상실을 처음으로 겪고 있었다.

이기적 이게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 슬픔들이 각자의 삶에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 어떤 슬픔 조차 무감해지고 있다.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잖아.

라고, 생각하고 만다.


내 평생 처음으로 사랑했던 강아지가 17년을 살고 평온한 죽음을 맞았을 때도 난, 다니는 회사 화장실에 가서 오열을 하고 조퇴를 해야 했고, 한 동안 가족들 사이에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시되었었다. 그때는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또 슬픈 일이었다. 돌아보면 지극한 사랑을 받고 온 가족의 보호를 받으며 참 행복한 생을 살아간 아이였는데도 난 그렇게 슬펐었다.


그런데, 지금의 슬픔이라는 것은, 슬픔이라고 표현하기 싫을 정도로 무겁다.

말 그대로 심장이 뚫린 것 같고, 생각만 해도 목이 메어온다.

살 수 있었던 날들에 대한 원통함과, 살아계셨다면 볼 수 있었던 것들, 또 할 수 있었던 일들, 갈 수 있었던 길들에 대한 남은 자의 아쉬움과 한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파온다.


그렇지만 이 모든 아픔의 근원은 다시는 보지 못한 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또 아무리 아무리 그리워해도

다시는 아빠를 볼 수 없다는 불변의 사실


다음 세상에는, 혹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라는 말의 허망함을 현생의 지금은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한다.


따뜻했던 그 이마를 짚었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사무치도록 아프다.


두 글자가 오늘 내게 준 아픈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위로가 바람처럼 마음을 스쳐가기만 하고 결코 오래 머물지 못한다.

조금만 덜 사랑할 것을

아니, 조금만 덜 사랑받을 것을

아니, 조금 더 사랑할 걸


장갑을 벗다가, 그 아픈 중에도 항상 오른쪽 주머니에 오른손 장갑을, 왼쪽 주머니에 왼손 장갑을 챙겨 넣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 또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아니지,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없다.


여러 번의 사랑을 했었다.

아프지 않은 헤어짐이 없었다. 타인의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에는 항상 대가가 있었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길수록 또 즐거웠었을수록 혹은 사랑이 그의 영혼에 까지 이르렀을수록 사랑했던 시간의 무게가 휘어놓은 나의 공간이 온전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너무 잘 지내지는 말기를 그래도 잘 지내기를 바랄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욕망이 사라질 때쯤 언젠가 우연히 마주치면 웃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또 그 시간들은 나의 지금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순수한 슬픔이라는 것은 없었다. 원망과 안도의 마음이 버무려져 상실의 슬픔으로부터 나를 잘 막아낼 수 있었고, 나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연애는 고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괜찮지가 않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누구도.

다섯 살의 나에게 그네를 만들어 주었던, 목마를 태워 아빠 키보다 더 큰 세상을 보게 해 주었던

세상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었던, 현명한 조언 외에는 그 어떤 나쁜 말도 내게 한 적 없었던,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게 해 주었던, 그 누구에 대한 험담도 한 적이 없었던, 내 모든 것들에 대해 늘 나보다 더 깊은 기도를 해 주었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그 사랑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었던

하나밖에 없는 내 아빠를 잃어버린 일로는 나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고, 아무런 방어기제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아직 아빠가 살아계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부럽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닌 모든 슬픔이 부럽다.


사랑은 그래서 고통이다.

이제는 사랑한다는 것이 두렵다.


길에서 사는 연약한 존재인 길고양이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랑이 고통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추위와 더위, 눈과 비, 배고픔. 그런 것들이 나의 고통이 되어 갔었고, 사랑하지 않을 때보다 나의 삶은 조금 더 고단해졌었다. 하지만, 길에서 고양이를 만날 때마다 나는 반가웠고 그 반가움은 내 삶의 중요한 기쁨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아이들을 전부 구조할 수 없다는 것도 학대를 전부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또 변호사로서 길가의 동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 사랑의 무게만큼 나는 자라났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순수한 슬픔 그 자체이다.

슬픔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슬퍼할 수만 있을 뿐

그 무력한 시간 앞에서 나는 부존재에 대한 깊은 절망의 시간을 깨달아 가고 있다.


슬픔이 나의 길을 가로막을 때,

숨 쉴 수 없이 많은 눈물이 그리움을 토해 낼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또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그것이 또 내 시간을 슬픔으로 적실지라도

그래서 오늘의 밤은 또다시 상실의 어둠으로 뒤덮일지라도.


보고 싶다.

웃는 얼굴의 당신을



작가의 이전글 나의 사랑, 나의 시, 나의 결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