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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Mar 22. 2023

나는 그 피고인을 변호할 수 있을까



아이의 몸에는 온통 색이 다른 멍이 들어 있었다. 만11세인 아이의 몸무게는 3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다. 아이는 친엄마를 만날 수도 없었다. 너무 보고 싶어 친엄마가 아이를 학교로 찾아 간 날 아이는 친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로 계모에게 전화를 걸고 스피커폰을 킨 뒤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런 일에 대비한 예행 연습과 대본대로 하지 않을 경우 아이가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을 악행이 스쳐갔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먹은 음식은 아마도 편의점에서 2+1으로 사서 마신,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셨던 그 음료수일 것이었다. 바지를 머리에 씌우고 의자에 결박하여 놓고 CCTV로 감시한 날이 그 하루였을까. 아이를 연필로 찌르고, 뜨거운 것으로 화상을 입히고 때리고 먹이지 않고 학교를 보내지 않고 앞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의자에 묶어 둔 계모와 그 모든 것을 자신은 몰랐다고 주장하는 그 아이와 함께 살았고 그 아이를 낳은 친부. 슬프게도 이런 일들은 적용 법조를 바꾸고 처벌을 강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아이들의 이름만 바뀔 뿐, 또 어떤 아이는 그 지옥의 마지막 단계에서 목숨을 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지옥에서 죽음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야 세상에 고통의 시간을 고할 수 있다. 그 모든 일들이 가정 안에서, 친권을 가진자로부터 자행되기 때문에 사실 이런 류의 아동학대를 근절 할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감이 든다.

범죄심리학에서는 성범죄나 폭력 범죄의 기본적인 심리를 ‘통제’라고 본다. 학대는 그 전형일 것이다. 나보다 약한 존재를 통제 할 수 있다는 쾌감을 한 번 알게 된 악인들은 더욱 더 그 통제의 정도를 강화하고 폭력을 극대화하여 만족감을 얻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고 생활을 조종할 수 있고 신체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 쾌감이 될 때 그 악행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가정일 것이고, 자신의 아이가 아닌데 자신의 가정에 속한 아이에 대하여 어쩌면 친모에 대한 질투와 내 아이가 아닌데 내가 양육을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불만으로 점화된 ‘미움’에 대한 합리화가 처음에는 훈육이라는 핑계의 사소한 폭력으로 점화되어 점점 더 확장될 것이고 그 사이 죄책감은 둔감해질 것이며 결국 가해자는 아이에게서 ‘사람’을 박탈하고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스스로 덜어냈을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반성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슬퍼할 수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것, 그리고 보복의 목적으로 살인하는 것에 대한 처벌의 경중은 다르다. 그렇다면 몇 년에 걸쳐 아이의 인격과 신체를 서서히 말살하면서 죽이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처벌이 합당한 것인가. 반항조차 할 수 없는 작은 아이가 견뎌야 했던 그 많은 시간에 대해 법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라는 것을 내릴 수 있는 걸까. 만약에 내가 아동학대살인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이 된다면 나는 그를 변호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1해가 넘는 재산이 있고 자신이 스타링크를 가동시킬 능력이 있으며 프리메이슨과 같은 세계적인 비밀결사조직의 조직원이라는 피고인의 주장은 부끄럽지만 그 피고인은 내가 변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악행에 대하여 변명으로 일관하고, 아이의 몸이 말하고 있는 상처에 대하여 부인하고 축소시킨 범죄사실에 대하여는 합리화하는 아동학대 사건의 피고인을 내가 변호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국선변호사의 인성면접에 이 질문이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들도 헌법에 정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형사 절차 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조력하겠다’ 정도가 무난한 답변일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아이의 가해자인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정된다면 도저히 그들을 ‘변호’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사임계를 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아직도 국선변호사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기록을 읽고 그 기록을 살필수록 그 아이의 슬픔과 고통이 나에게 파고들어 더더욱 그들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내가 변호하는 것은 그 피고인에게도 전혀 유리할 것이 없다는 측면에서 나는 그를 변호하면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이름도 모르는 인천에 사는 12살 아이가 겪었을 몇 년이, 요약되어 나에게 넘치는 슬픔과 분노로 다가왔다. 피해자 변호사로 일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나를 채워 하루하루 내가 소진되어가는 것 때문에 몹시 힘들었었다. 친족 성폭행 사건의 조사동석이 있는 날에는 영상녹화를 하고 속기록에 그 글자들이 적혀질 때 글자 하나 하나가 그 시간들을 살려내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래서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피고인을 변호하면서 마음이 그렇게 무거워지는 사건은 별로 없었다. 정말 억울했던 공무집행방해의 피고인 할아버지에게 무죄를 받아주지 못했던 때 마음이 아팠었지만 그런 사건은 그렇게 자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피고인의 변호인을 하는 것이 나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 지난 1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천의 그 아이 사건을 접하고 내가 과연 저 사건 피고인의 변호인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을 해보니, 피고인의 변호인을 하는 것은 나에게 과연 맞는 일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변호사랑 맞지 않는 것인가.

슬픔과 회의와 아픔과 분노의 마음을 아이에 대한 기도로 달래 본다.
이곳이 지옥이었고, 천국이 없었을 너의 시간들에 이제는 평안이라는 ‘없음’이 너에게 위안이 되길. 다시 태어나길 원하지 않겠지만, 다시 태어나 가끔은 피자도 시켜먹고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밥을 주고 게임은 정해진 시간에만 하라고 잔소리도 하는 엄마와 공놀이를 같이 해주고 무심하지만 너를 지켜주는 아빠를 만나 평범한 아이로 살아볼 수 있기를 이모가 기도해줄게. 너에게 이 시를 적어 주고 싶다. 너에게 이제 다른 슬픔은 없기를 바라며 슬픔에 대한 시를 놓아 둔다,


내 삶은 폐쇄되기 전에 두번 닫혔다

에밀리 디킨슨

내 삶은 폐쇄되기 전에 두번 닫혔다.
그러나 두고 볼 일.
불멸이 나에게
세번째 사건을 보여줄지는.

내게 닥친 두번의 일들처럼
너무 거대하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절망적일지는,
이별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아는 모든 것.
그리고 지옥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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