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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선 ‘돌봄’, 낭독극... 사회적 쓸모 증명

33. 문화기획자의 동해실험실

by 조연섭

예술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이 해묵은 질문에 대한 응답을 찾아 프로그램 현장을 방문했다. 21일, 봄날 같은 화사한 오후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재학생과 대학원생, 시민들이 6개월 간 공들여 준비한 시민 낭독극 '돌봄을 읽다' 무대가 올려지는 경희대학교 네오르네상스관이다.


이번 공연은 희곡 선행 학습으로 인문학 자료를 함께 탐독하고,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경험을 치열하게 토론하며, 시나리오 집필부터 무대 연기까지 예술 창작의 전 과정을 참여자들이 오롯이 일궈낸 결실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 기획은 문화예술경영학과 강윤주 주임교수가 맡았다. 6개월의 여정, 추상적 관념에서 구체적 '노동'으로 프로젝트는 지난해 하반기, 온라인 희곡 읽기 수업으로 첫발을 뗐다. 참여자들은 돌봄을 다룬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매개로 각자의 돌봄 경험을 나누는 토론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돌봄'은 더 이상 사전 속의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돌봄은 시간의 품을 파는 일이다."


가족 간병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쓴 한 참여 작가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돌봄은 관념이 아니라, 몸과 시간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노동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라며 창작의 소회를 밝혔다.


무대 위에 오른 네 편의 단막극은 돌봄의 다양한 층위를 비췄다. AI 돌봄 '미미 인형'과 홀로 사는 노인의 관계를 통해 AI 전환 시대를 실감했으며 기술이 인간적 관계의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가 하면, 치매 부모 돌봄, 폭력의 기억을 품은 청년의 자기 돌봄, 노년 부부의 갈등과 해방까지 폭넓게 다뤘다.


이들은 서로 다른 결을 지녔지만, 결국 '관계'라는 하나의 큰 돌봄 강 줄기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시민이 작가이자 배우로, "읽기의 예술, 이해의 실천" 이번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 연극인이 아닌 대학생과 시민 참여자들이 직접 대본을 쓰고 무대에 섰다는 점이다.


연출은 김윤규 청주대 연극학과 교수가 맡았고, 동국대 연극학과 남지수 대우교수가 지도를, 강래희, 임영희, 최유진, 하선경이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했다. 또한 청주대 연극학과 학생 배우들이 함께 호흡을 맞춰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다. 행정과 운영 면에서는 경희사이버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든든한 지원이 뒷받침되었다. 정수진 팀장과 대학원 황선영 조교, 학부 박신영 조교, 김서연 스태프 등의 세심한 노력이 있었기에 시민 참여형 공연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연출을 맡은 김 교수는 "글로만 존재하던 이야기가 관객을 만나면서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며 "낭독극은 읽기의 예술이자,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실천의 장"이라고 평가했다. 연기 경험이 적은 시민들이었지만, 무대 위 떨리는 목소리로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현장의 열기는 뜨거워졌다. 돌봄은 더 이상 개인 가정사가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공동의 감정'이 되었다.


공연보다 뜨거웠던 대화, "자신을 먼저 돌보세요"


1시간의 공연 직후 이어진 40분간의 '관객과의 대화'는 공연 못지않게 밀도가 높았다. 치매 남편을 돌보는 한 어머니는 객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딸이 이런 글을 쓴 줄 전혀 몰랐고 화면에 사진이 나와 깜짝 놀랐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장에서 필자는 어머니와 가족에게 어머니에게 '어머니 휴가 보내기 시민운동'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고 싶을 정도로 감동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돌봄을 둘러싼 가족 간의 죄책감과 고단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한자리에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엄마 빼돌리기 글 주인공과 토론을 진행하는 강윤주 교수, 사진_ 조연섭

강 교수는 "너는 작가야, 너는 배우도 될 수 있어, 너는 세상의 날개야" 라며 늘 응원했어요


토론 소감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작가이자 배우로 참가 한 최유진(여, 26) 학생 배우가 남긴 말이다. 학생은 "평생을 받기만 했던 본인은 돌봄을 모른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본인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강래희 학생 배우와 결혼을 앞둔 남자 친구는 "네 편의 작품이 결국 '자기 돌봄'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남겼다. 참여자들 역시 "돌봄은 타인을 위한 일방적 헌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먼저 지키는 일임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예술, 사회적 담론의 장이 되다


일반 관객으로 참석한 시민들로 다음 프로그램 일정을 물어볼 정도로 감동이었던 이번 프로젝트는 문화예술경영 교육이 이론의 상아탑을 넘어 실천적 현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예술이 개인의 서사를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하는 강력한 장치임을 보여준 셈이다. 특히 고령 사회로 진입한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피할 수 없는 화두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부터 AI 기술의 역할, 노년의 존엄성까지, 이번 낭독극은 이 복합적인 질문들을 예술의 언어로 유연하게 풀어냈다.


총괄 기획자 강 교수는 "돌봄은 약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며 "예술이 사회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공론장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전했다.


무대 위 조명이 꺼진 뒤에도 묵직한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을 제대로 돌보고 있는가.' 경희대학교 네오르네상스관에서 울려 퍼진 네 편의 돌봄 이야기는 끝났지만, 우리 사회의 '돌봄'에 대한 사유는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

돌봄을 읽다. 무대 현장, 사진_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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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CU]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활동분야_ 문화기획, 연출, 감독, 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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