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맛
위험한 발언이지만 어렸을 때 나는 기획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랐다. 심지어는 나이 좀 찬 대학교 고학년 때까지도 몰랐다. 교내 동아리를 들어서도 나는 유일한 디자인 팀원이었고 다수가 기획팀인데도, 도대체가 뭐 하는 팀인가 싶었다.
돌이켜보면 정확히는 기획에 대한 범주를 몰랐던 것 같다. 기획은 어디까지인가, 결과물에서 어느 정도로 크게 작용하는가, 너무나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이 기획인지라 바깥에서 보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하지 않는 한,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무형적인 것이라 느껴져 쉽게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1년 2년 일한 경력을 쌓아가면서, 심지어는 회사 밖에서도 내가 감탄하는 부분은 모두 기획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소하게 영화를 보면서도 드라마를 보면서도, 일상을 간편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서비스에서도. 뭐 하나 그냥 기획된 것이 없다. 기획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사람을 도파민 돋게 하는 인공적인 것은 로또뿐이라고 느껴지는데, 이 조차도 당첨자에게 당첨 소감을 공개하게 하니 이 과정에서 분명 누군가의 기획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에게 누가 제일 존경스럽냐고 물어보면 고민할 것도 없이 기획하는 모든 이들이라고 답한다. 보통 기획팀은 인정받기 힘든 편인 것 같다. 나 역시도 기획이 무엇인가를 늦게 안 편이 맞고, 지금까지도 그 범주에 대한 답을 내리기 힘들다. 옆에 있는 기획자를 지켜봐도 남이 보면 완벽해 보이는 본인의 프로젝트를 가감 없이 내려친다. 물론 기획은 업계별로 직무별로 상이하게 요구되고 그 값어치를 매기는 방식도 다르니 내가 말하는 모든 기획자들은 여러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기획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결과물도 세세하게 볼 것이다. 같은 영화를 봐도 동일한 책을 읽어도 입력값이 다를 것이다. 볼 줄 아는 시각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 기획하는 자들만의 특권일 수도 있겠다. 맛도 이미 먹어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줄 아니까?
이렇게 기획의 가치를 나마저 늦게 알았으니 일찍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적어도 한 조직의 대표가 된다면 기획팀의 이름을 쉽게 붙였다 떼고 막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실제로 기획의 노고와 중요성을 아는 대표 아래서 변태 같은 서비스들이 나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