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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Dec 19. 2023

사랑, 위험과 붕괴의 미학

영화, 《헤어질 결심》

 도입.

 무너지고 깨어진다. 품위와 자부심이 있던 한 형사는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만난 어느 꼿꼿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처절한 무너짐에 대해, 그리고 처절한 사랑에 대해 그들은 함께 속삭인다. 진실을 밝힐 수도, 진심을 말할 수도 없는 두 사람의 헤어질 결심은 영원한 미결사건으로 남는다. 2022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배우 박해준과 탕웨이가 호흡을 맞추었으며, 불륜이라는 위험하고 자극적인 소재임에도 차분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그려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출처: 모호필름)

 《헤어질 결심》은 1960년 개봉한 《안개》의 현대식 변주로도 느껴진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정훈희의 ‘안개’를 주제가로 하는 이 영화는,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다,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 배경이 된다는 점, 남녀의 위험한 사랑을 다룬다는 점, 남자 주인공의 갈등과 여자 주인공의 욕망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과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그렇기에 《헤어질 결심》의 원형을 《안개》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한 본 영화에서는 2000년 개봉한 홍콩 영화 《화양연화》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불륜을 소재로 하지만 정중한 분위기, 매혹적인 여주인공과 깔끔한 남주인공, 대사보다 화면 자체로 정보를 전달하는 미장센 등이 그렇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본 영화는 안개의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그려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 위험의 미학

 불륜이라는 소재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낯설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도 ‘위험’은 존재한다. 특히 살인 사건으로 만난 해준과 피의자 서래의 사랑은 더욱 위험하다. 영화는 해준이 위험한 사랑에 어떻게 빠지게 되는지를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영화 초반, 망원경으로 서래를 관찰하는 그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장면은 해준의 마음이 그녀에게 어떻게 열리게 되는지를 관객에게 자연스레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 장면도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위험한 것임을 내포한다. 망원경을 통한 시선이 관음적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마치 그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고 체취를 맡는 해준의 모습은 특히 불쾌하다. 이렇듯 같은 시퀀스를 통해 해준이 서래에게 심리적 거리를 좁히게 되는 계기와 그들의 사랑이 부도덕하며 위험하다는 것을 이중적으로 보여준다.


 길고양이에게 죽은 까마귀를 선물로 받는 서래의 시퀀스도 사랑의 속성을 함의한다. 길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한 서래의 중국어는 해준의 번역기를 통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라고 들려온다. 본래 서래가 의도한 단어는 ‘마음’이었지만, 번역기를 통해 건조한 남성의 목소리로 ‘심장’이라고 변주된 것은 어쩐지 섬뜩하다. 이것 역시도 그들 사랑의 속성을 함의한다. 해준이 서래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심장을 주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위험한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의 속성을 함축하는 또 다른 장치는 영화 속 삽입된 서브플롯 ‘질곡동 사건’이다. 질곡동 사건의 범인 산오는 사랑 때문에 타인과 자신을 살해했다. 이것은 영화에서 다루려는 사랑이 위험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산오를 추적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라고 말한 서래의 대사 역시 산오가 했던 사랑이 무엇인지, 해준과 서래가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꿰뚫는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출처: 모호필름)

 한편,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충돌이기도 하다.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라는 서래의 대사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영화는 같은 장면 안에 또 다른 프레임을 두는 ‘프레임 속의 프레임’ 기법으로 이를 표현한다. 해준과 서래의 취조실 시퀀스에서 사용된 이 연출을 통해, 둘은 같은 공간(취조실) 안에 있으면서도 각각의 프레임(모니터)을 통해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영화에서 프레임은 세상을 규정하는 틀이기에 서로 다른 틀에 갇힌 것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는 것과 같다. 서래와 해준의 소통을 도와주는 번역기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장치로 활용되는데, 이러한 것은 그들 사랑의 위험이 어쩌면 도덕적 차원 이상의 위험임을 보여준다.


 2. 붕괴의 미학

 불륜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뜨거운 스킨십 등 자극적인 연출과 분위기가 뒤따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진중한 방식으로 그들의 사랑을 다룬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를 사랑한 방식은 ‘붕괴’다.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무너뜨리고 깨뜨리는 것. 그렇기에 오히려 그들의 사랑은 우아하고 강렬하다. 그들의 사랑이 위험하나 아름다운 까닭은 그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행했기 때문이다.


 품위 있는 형사였던 해준은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망친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증거물을 건네며 “휴대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고 서래에게 말한다. 이것은, 비록 자신이 무너지고 깨어지더라도 서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 후 해준은 이포로 근무지를 옮기기에, 그 고백은 사랑에 관한 것이나 역설적으로 헤어짐에 대한 것과 같다. 해준의 사랑할 결심은 헤어질 결심이다.


 영화는 줌인과 줌아웃, 그리고 클로즈업 기법을 통해 이 장면을 고조시킨다. 서래에게 안긴 해준을 줌인하며 휘몰아치는 그의 감정을 보여주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고 말하는 해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서래를 향한 뒤섞인 감정, 원망, 분노, 사랑, 슬픔 등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심리를 보여준다. 해준이 사라진 뒤, 홀로 남은 서래를 비추며 서서히 줌아웃하는데, 그것을 통해 그 상황 속에서 서래가 느낄 외로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비춘다. 그 후 곧 서래는 사전에 붕괴를 검색한 뒤, 그 뜻을 음미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느끼는 서래를 보여주며 관객은 그 장면의 감정적 여파를 함께 체험한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출처: 모호필름)

 한편,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진실과 진심을 숨기며 해준에게 다가갔던 서래도, 해준의 ‘붕괴’ 이후 그녀 역시 그와 같은 사랑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는 휴대폰을 돌려주며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해준이 이를 택하지 않자,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붕괴임을 확신한다. 결국 서래도 그가 행했던 방식대로 사랑을 행하기를 택한다. 해준이 ‘휴대폰’을 바다 깊이 버림으로써 붕괴를 실현했다면, 서래는 스스로가 그 휴대폰과 같이 되어 바다 깊이 잠기는 것이다.


처음에 그것을 알지 못했던 해준은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그랬….”이라고 말했지만, 이후 자신이 사랑한 방식대로 서래가 사랑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해준은 바다 위를 다니며 서래를 찾아댄다. 이 장면에서 극적 아이러니를 통한 서스펜스가 발생하는데, 해준은 서래가 이미 모래 속에 파묻힌 것을 알지 못하지만, 관객은 그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서래를 찾는 해준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며, 감정적 충격을 받는다. “나는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왔나 봐요.”라는 서래의 대사는 그 결말에 대한 복선으로 볼 수 있다. 해준이 미결사건을 벽에 붙여놓으면서까지 잊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기억하는 서래는 그와 영원히 헤어짐으로써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를, 그와 영원히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사랑할 결심이다.     


 마무리.

 해준과 서래 모두 자신을 무너뜨리고 깨뜨리며 상대를 사랑했지만, 둘의 사랑은 영화 마무리 직전까지 어긋나 있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출처: 모호필름)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살해된 후, 해준은 서래에게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헤어질 결심’이 무의미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헤어짐으로써 행한 사랑이, 그녀가 다시 나타나면서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해준을 향한 ‘사랑할 결심’을 하고 이포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해준은 서래가 자신과도 같은 사랑의 방식을 택할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래가 결심을 실행에 옮긴 이후, 즉 그녀의 사랑이 시작된 이후, 해준은 ‘마침내’ 자신과 그녀가 같은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라는 서래의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낸다. 사랑을 위한 해준의 헤어질 결심, 헤어짐을 위한 서래의 사랑할 결심을 모두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방식을 보여준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부드럽고 감각적이지만, 강렬하게 선사한다. 사랑이란, 어쩌면 수갑을 찬 것과 같고, 어쩌면 손을 잡은 것과 같은 위험과 붕괴의 미학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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