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버닝》(이창동, 2018)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
해미는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분명한 현실적 압박이 존재함에도 그것 이상의 결핍을 충족하려는 이상을 가진 ‘그레이트 헝거’로 그려진다. ‘그레이트 헝거’란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먼족의 개념으로 배가 고픈 ‘리틀 헝거’를 초월한,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을 뜻한다. 물론 해미는 늘 춥고 어두우며, 하루에 딱 한 번만 그것도 남산 전망대에 반사된 햇빛이 들어오는 북향집에 살고 있고, 돈이 한 푼도 없는 ‘리틀 헝거’의 측면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는 그것 이상으로 굶주려 있음을 계속해서 암시한다. 예컨대, 남산 전망대에 반사된 허상과도 같은 빛을 ‘햇빛’으로 여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해미가 배우는 팬터마임과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인 보일이의 존재와 그녀가 어린 시절 빠졌다고 언급한 우물도 그 예시이다.
해미는 종수와 처음 가진 술자리에서 팬터마임 수업에서 배운 ‘귤껍질 까기’를 행한다. 그녀는 상상 속의 귤을 들고 천천히 껍질을 벗겨, 한 알씩 입에 넣고 씹다가 찌꺼기를 뱉어내는 모습을 보인다. 팬터마임에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종수에게, 해미는 귤의 존재를 생각하지 말고 귤의 부재를 망각하면 된다고 말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현실적인 문제보다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실재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 해미가 종수를 집으로 불러낸 그녀의 고양이 ‘보일이’와 해미가 어린 시절 종수에 의해 구해졌다던 우물 역시 같은 맥락에서 활용되는 장치다. 그것이 실재적으로 해미 삶에 의미로 작용한다면, 현실이든 그렇지 않든,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상에서는 그것을 통해 종수와 해미의 관계와 교제가 실제로 이루어졌으므로, 즉 삶의 의미 중 하나로 작동했으므로 이미 그것을 만끽한 해미의 입장에서 사실 여부는 더 이상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 해미는 ‘사실’보다 ‘진실’이 더 중요한 사람, ‘그레이트 헝거’다.
‘그레이트 헝거’로서의 해미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 중반부, 해미가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그 춤은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 그녀가 부시먼족의 의식을 통해 경험한 춤이다. 부시먼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할머니가 북을 치며, 나머지는 그녀를 둘러싸고 춤을 춘다. 처음에는 땅을 향해 손을 뻗어 ‘리틀 헝거’의 춤을 추지만, 곧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춤은 초저녁에서 시작해서 해 질 무렵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리틀 헝거’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간다.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는 총 두 번 이 춤을 선보인다. 첫 번째는 벤과 그의 친구들 곁에서 춤을 설명할 때다. 해미는 그들에게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며 설명하지만, 벤과 친구들은 그것을 보며 헛웃음을 짓거나 하품한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벤과 그의 친구들은 삶의 의미를 딱히 구하지 않아도 되거나 그저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되기에, 그들은 해미의 춤이 그저 우스꽝스럽거나 지루한 몸놀림 따위로 보았던 것 같다.
그녀가 두 번째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췄을 때는 앞서 언급했던, 해 질 녘 종수의 집에서다. 첫 번째 때와는 다르게 Miles Davis의 générique가 흘러나오며 롱테이크 숏을 사용한 장엄한 연출이 이어진다. 그녀는 종수와 벤 앞에서 옷을 벗은 뒤, 양손으로 자유를 상징하는 새의 형상을 만들며 팬터마임을 한다. 그리고 그 새는 하늘을 향해 펄럭인다. 곧 그 펄럭임은 하늘을 향해 답을 구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으로 다시 바뀐다. 춤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다. 이 장면은 해미가 삶의 의미에 굶주려 있는 인물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배경 음악의 제목인 générique라는 프랑스 단어는 ‘일반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이러한 제목은 해미라는 인물이 특이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이며 평범한 청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누구나 그 시기를 살던 때에는 해미와 같이 삶의 의미를 구했었을 테니까.
그렇게 춤을 추던 해미는 흐느끼기 시작하는데, 어쩌면 그녀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도 존재했던 것 같다. 그녀의 두려움은 선셋투어를 다녀온 경험을 종수에게 이야기할 때도 드러난다. 관광객이 버린 쓰레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주차장 같은 공간에서 홀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본 그녀는 슬픔과 외로움을 느꼈다고 말하며 울먹인다.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이러한 두려움은 세상 속에서 ‘그레이트 헝거’로 살아가는 청춘의 두려움을 대표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의문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을 때 느끼는 공포와 절망감이 해미의 눈물 속에 담겨 있다. 죽음과도 같은 그러한 어둠에 사로잡혀 모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한번은 품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이렇듯, 수수께끼 같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전전긍긍하는 해미의 모습은 청춘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게 청춘의 시절을 견디는 보편적인 관객들에게 공감을 샀던 해미는 영화 중후반 갑작스레 사라진다. 종수의 시선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벤이 종수를 죽였으리라고 확신하도록 관객의 감상을 유도한다. 물론 이것이 가장 그럴듯해 보일지도 모른다. 보일이로 추정되는 고양이는 벤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종수가 해미에게 선물한 분홍색 시계 역시도 벤의 집 캐비닛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범인이라는 직접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종수가 그동안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던 고양이가 딱 한 번 ‘보일이’라는 부름에 반응했다고 해서, 그 고양이가 보일이가 맞다 말하기에는 부족하며, 해미에게 준 시계 역시 영화 중반 잠시 등장한 텔레마케터가 차고 있는 것으로 등장하며 흔한 시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벤이 해미의 살인자가 아닐 수 있다. 해미는 그저 종수의 말에 상처받고 떠나버렸을 수도 있다.
이렇듯 영화는 정황만 남긴 채 해미의 끝을 불명확하게 맺는다. 그렇기에 해미가 이 영화 속에서 객체화된 캐릭터로 남아버린 것처럼 보여 젠더 문제가 지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영화는 계속해서 주체로서의 해미, ‘그레이트 헝거’로서의 해미를 담아내려 했다. 그리고 영화는 자신의 의도를 초중반 일관되게 관철함으로써, 해미를 보편적인 청년들의 총체적 캐릭터로 만들어 냈다. 비록 그 끝이 흐리긴 했어도, 그것은 서사적 흐름 때문이었을 뿐, 해미라는 캐릭터 자체는 주체로서 남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미라는 인물이 종수만큼, 어쩌면 종수보다 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