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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Apr 26. 2024

섬뜩한 말을 하는 너에게

만 여덟 살 아이의 봄(2024.03-2024.05)




목을 따 버릴 거야.


 

매주 대여섯 명 아이들과 숲체험을 하고 있다. 숲체험을 한 지 1년, 며칠 전 숲체험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숲체험을 하는 한 살 위 형과 불편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 이번 일은 어머니도 아셔야 할 것 같아 전화를 드렸단다. 대화는 길게 이어졌지만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아이가 쌓은 나무 조각이 무너지면서 형의 얼굴에 닿았고 상처가 생겼다는 것. 아이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 이 일은 넘어갔지만 문제는 그다음, 아이가 형을 향해 "목을 따 버릴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형은 생전 듣지도 보지 못한 섬뜩한 말에 상처를 받았고, 아이가 쌓은 나무 조각이 무너져 자기 얼굴에 상처가 났으니 아이와 함께 숲체험을 하는 게 불편하다는 요지였다.


선생님은 최근 스트레스를 받은 일은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당황해서 처음에는 횡설수설했다. 아이가 원래 죽음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다고, 평소에도 죽음에 대한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건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고. 아마 화가 많이 나서 가장 강한 표현을 쓴다는 것이 바로 그 '목을 따 버릴 거야."라는 말일 거라고. 이어 아이가 유연성 평발이라 운동 신경도 부족하고, 손가락 인대도 늘어나 소근육도 약하고, 이 밖에도 잘하는 게 없어서 자존감이 낮다고, 그럼에도 굉장히 경쟁적인데 자신보다 누군가 잘하는 것만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이때 '죽음'과 관련한 과격한 표현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선생님은 나에게 숲체험 요일을 변경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경쟁적인 데다 자기보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사람이 함께 있다면, 그 상황이 아이에게 나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다른 일정 때문에 수업 요일은 바꾸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이럴 때마다 나는 정말 부끄럽게도, 아이가 아닌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엄마로 비칠까 두렵다. 말이 자꾸 길어진다.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이 자꾸 입 밖으로 나온다.


"선생님, 저도 아이가 그런 말을 쓰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경쟁을 부추기는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숲체험을 시작한 거였어요. 집에서도 '죽어버려'와 같은 말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가르쳐 주고 있어요. 혹시나 그런 일이 또 생기면 저한테 말씀 주세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누군가 저희 아이 때문에 불편하다면, 이 수업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해 볼게요. 제 아이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보면 안 되잖아요."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은 더 있었지만 그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마 학교에서 이런 전화를 받았다면, 사회성 관련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아이의 부족한 점을 고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말인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말인지 나는 잘 모른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는 것. 결국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방법 밖에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이 학교에서 벌어졌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대안학교, 홈스쿨링, 아니면 외국으로?


나는 그날 아이에게, 네가 형에게 했던 말은 언어폭력이며 그 이유가 무엇이든 네 편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기면 숲체험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아이는 약간 빈정대는 말투로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엄마 언제까지 그 얘기할 거야?" 아이가 묻는다. 나는 "네가 알아들을 때까지, 네가 고칠 때까지 얘기할 거야."라고 말했다. 아이는 계속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라고 성의 없게 대답했다.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사실 두렵다. 어쩌면 이건 시작일지도 몰라.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몰라. 그럴 때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정리해 둬야 한다. 혹시라도 진단과 관련한 말들은 하면 안 된다. 하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소문의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으니까.



아이가 굉장히 경쟁적이에요.
누군가 자신보다 잘한다 싶으면
죽어버려, 와 같은 나쁜 말이 나와요.
집에서도 계속 주의를 주고 있어요.
혹시 이런 일이 생기면 꼭 말씀해 주세요.
계속 노력할게요.


PS. 일단 이 일은 아이가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선생님도 아이들끼리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나긋하게 말씀해 주셨다. 요즘은 숲체험 하기 직전, 단단히 아이에게 일러두고 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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