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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May 24. 2024

네가 아닌 내 문제

만 여덟 살 아이의 봄(2024.03-2024.05)



이걸 완벽주의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부모-아동 상호작용 치료 프로그램(Parent-Child Interaction Therapy, PCIT)을 듣기 시작하면서 아이와 함께 노는 시간이 늘었다. 숙제처럼 받은 아이주도놀이(Child Directed Interaction, CDI) 매일 10분. 그래봐야 10분 정도지만, 아이가 노는 일이 어려운 엄마에게, 매일같이 빠짐없이 아이와 노는 상당한 품이 든다. 그래도 계속 놀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PCIT 선생님이 알려준 모방, 묘사, 반영, 칭찬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놀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 내가 무슨 대응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도미노나 클레이를 갖고 놀았는데 최근 며칠 동안 블록이나 종이로 뭔가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레고 블록으로 집을 함께 만들었다. 설명서가 없으면 못 만드는 아이인데도, PCIT 선생님 조언에 따라 설명서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 보자고 말했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내가 이것저것 힌트를 주었다. 그렇게 완성한 2층 집. 다 완성하고 난 뒤 아빠에게 자랑하겠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레고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아마 장난 삼아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2층 집의 구조를 탐색하기 위한 것일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완성한 2층 집을 완전히 기억하기 위해서? 


레고로 만든 2층 집을 분해하던 중 갑자기 집 한쪽 벽면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방금 만든 것과 똑같이 만들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이는 방금 전과 똑같이, 색상 배열도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아이에게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불행히도 무너진 면이 뒤편에 있어 반쯤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사진을 확대해 보며 사진에 나오지 않는 가려진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가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뒤로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아이가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채 나는 주차장에 내려가 운전석에 앉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라디오를 켰다. 지하라서 그런지 주파수가 잘 잡히지 않아 음악 중간에 지지직 잡음이 들렸다. 울지는 않았다. 울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 와중에도 누군가 주차장에 오는지 신경이 쓰였다. 나는 가만히 숨죽여 앉아 있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났다. 노래 두 곡이 끝났다. 아마도 12분쯤 되었을까? 혹시나 아이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을 까봐 집으로 올라왔다. 집 안은 고요했다. 나는 아이를 보지 않고 방에 들어가 이불 위에 누웠다.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엄마, 미안해."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좋은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무표정한 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차갑게 식은 말. 



이게 어머니 이슈일 수도 있어요.


PCIT 선생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아이주도놀이 중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하다가, 속마음을 꺼내버렸다. 아이가 짜증을 내는 게 너무 힘들다고, 이제는 작은 화도 견딜 수 없게 되었다고,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피하고만 싶다고. 선생님이 뭔가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 문득 아빠의 짜증 섞인 몇 마디에 속상해하던 내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직장 일 때문에 바빠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드물었다. 가끔 일찍 퇴근하거나 주말에 집에서 쉬던 아빠는 늘 피곤해 보였다. 아빠는 대체로 무관심했지만 때때로 짜증을 냈다. 가령 집에 왔는데 신발이 어질러져 있으면 화를 냈다. 나를 향한 짜증은 아니었다. 여기 왜 이렇게 지저분해,와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말이 듣기 싫어서 아빠 퇴근 시간에 맞춰 신발 정리를 했다. 


아빠가 찾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다고 화를 낼 때도 종종 있었는데, 스카치테이프나 가위 같은 집에서 공용으로 쓰는 물건을 쓸 때마다 나는 긴장을 했다. 쓰고 제 자리에 갖다 놔야지. 물론 아직 어린아이의 다짐에 불과해 매번 신발 정리를 한 것도, 쓰고 난 물건을 제자리에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그 생각이 난다. 아빠의 불평 소리가 듣기 싫어 이런 일이 일어나질 않도록 애쓰는 내 모습이 생생하다.   


"이게 어머니 이슈일 수도 있어요." 

선생님이 말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거절이나 냉랭함, 짜증이나 화 같은 것에 쉽게 나는 상처받는다. 그동안 아이가 했던 여러 행동과 말들은 상처가 되기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가 화를 낼까 지레 겁먹는 나 자신이 보인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싫은 반응을 보이면, 내 안에서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그것에 아주 작고 작은 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제 견디지 못하겠다. 참을 수 없는 것이 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곧 폭발할지 모른다. 


"이게 어머니 이슈일 수도 있어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이가 화를 낼 때마다 유독 힘들어하며 상처받는 이유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지도. 어쩌면 이건 네 문제가 아닌 내 문제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다시 원인을 알았으니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 아이를 키우며 내 어릴 적 상처를 깨닫는다. 



지금이라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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