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가키 페리 터미널의 기념품 점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짧은 노란 머리에 이마에는 머리띠를 두르고, 토시를 낀 팔에는 작은 바스켓 같은 게 들려 있었다. 바스켓이라는 것이 납작하고 낮은 대나무 바구니다. 마츠리에 가마꾼 같기도 한, 어느 일본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전통적인 '일꾼'의 모습이었다.
'"고찌라데 이까나이데!
바쁘게 내쪽으로 오고 있어 비켜주느라 급한 마음에 처음엔 듣지 못했다.
"고찌라데 이까나이데!(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짜증스럽게 다시 말하길래 돌아보니 내가 밀려가듯 가는 방향은 가게 카운터 안쪽이었다. 미안하다고 하고 빠져나오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킬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사람이 손님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니, 내 어리바리한 모습이 한 눈에도 외국인여행자여서였을까? 도쿄와 교토, 나라, 오사카를 여행하는 2주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의 바른 사람들만 보다가 이런 일을 겪으니 화가 나야 하는 상황인지 신기한 일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법이니까 누구나 공손한 사회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정형화된 대도시의 관광지에서 시골사람들의 일상으로 옮긴 것 뿐이다. 터미널의 한 쪽에서는 간단한 도시락을 파는 가게가 몰려 있었다. 나는 오키나와의 명물인 스팸 (밥) 샌드위치를 샀다. 아주머니는 아무말 없이 샌드위치와 거스름을 내어주었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충분하다.
오사카에서 비행기로 2시간 반을 날아간 이시가키 국제공항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버스정류소에는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안내판조차 여행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호텔은 공항에서 출발하는 공항 익스프레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종착역인 페리 터미널 바로 전에 내리라고 하는데 시간이 되어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페리 터미널로 가는 다른 버스가 왔길래 터미널까지 타고 갔다가 거기서 택시로 호텔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짐을 싣고 자리를 잡고 나서도 출발할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그 사이, 원래 타려던 익스프레스 버스가 뒤에 와서는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게 보인다. 오기는 오는 거였구나. 한밤 막차도 아닌데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걸, 낯선 곳이라는 걱정으로 조바심을 낸 결과였다. 그래도 우리가 탄 버스가 리무진 버스는 아니어도 짐 실을 데도 따로 있고 직행이라 오히려 빨리 도착하기는 했다. 오사카에서 이시가키, 이시가키에서 이리오모테, 그곳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삿포로까지, 일본여행에서 가장 복잡하고 긴장된 구간의 시작이라 슬슬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갑자기 오지에 떨어진 느낌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나를 안심이라도 시키듯이 창밖으로 돈키호테 간판이 보였다.
원래 이시가키는 내게 있어서 꿈의 여행지였다. 방 하나 민박을 빌려서 하루는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하루는 동네를 거닐고, 하루종일 물고기를 먹으며 일주일쯤 지내보는 게 소원이었었다. 이번에는 가족여행이라서 일본의 갈라파고스라는 이리오모테 섬이 메인이 돼버리는 바람에 가는 길에 하룻밤 머무는 기착지가 돼버렸지만, 그래도 이시가키라는 이름은 특별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아무것도 없다. 이날 이시가키에서 타고 내리는 배는 이미 마감되어서인지 터미널에는 택시정류장은 있지만 택시는 한 대도 없고 우버도 되지 않으니 많은 짐을 들고 끌고 호텔까지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가는 길에 도로는 어둡지는 않을까? 큰 가방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있으면 저녁부터 먹을까? 고민하며 걸음을 옮기던 순간, 택시가 한 대 들어왔다. 기본요금 500엔인 거리였어도 무거운 짐을 싣고 내려준 게 미안해서 천 엔을 내고 거스름돈은 됐다고 했다. 기사 할아버지는 약간 의아한 듯하면서 받는다. 자연스럽게 고맙다고 하던 대도시의 택시기사들과 다르다. 일본의 대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성급한 판단인지도 모르겠는데, 대체로 이곳 사람들은 외국인 관광객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그게 오히려 진짜 여행을 시작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좀 전까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호텔에 도착해서 방에 짐을 내려놓는 순간 걱정도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단 하나, 이시가키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한 끼를 찾는 일이었다.
일본 여행의 난이도가 높은 이유
대도시 일본의 식당은 메뉴의 음식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곳도 많고 영어메뉴에 번호까지 달아 주문하기가 어렵지 않다. 더구나 일본의 음식이라곤 스시밖에 모르는 서양인들하고 달리 우리는 돈가스, 우동, 소바에 각종 덮밥까지 많은 종목을 현지와 거의 비슷한 퀄리티로 이미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인에게 일본음식은 마냥 쉽고 친숙할까? 관광객보다 지역 주민이 많은 식당에서 사진 한 장 없이 일본어로만 되어 있는 메뉴에서 금방 좋아하는 걸 골라낼 수 있을까? 이시가키에서의 하룻밤, 바닷가에 왔으니 싱싱한 생선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일식당에 들어갔는데 뭘 주문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영어 메뉴도 종이에 간단하게 적혀 있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회를 주문하자 예쁜 기와를 접시 삼아 여러 종류의 생선을 두 점씩 가져왔다. 이름표가 따라왔는데 마구로 외엔 모르겠어서 파파고로 스캔해 봤다. 손글씨여서인지 한국에서는 잘 안 먹는 종류이기 때문인지 제대로 번역하는 게 하나도 없다. 근처에서 잡힌 운 나쁜 물고기겠거니 하고 먹는 수밖에.
주먹밥은 일본된장, 미소가 얹어져 나왔다. 미소라는 건 원래 국을 끓이는 게 아니었나? 빨간 미소와 하얀 미소 중에 늘 흰 시로미소만 사서 먹던 내가 특이한 맛의아까미소를 주먹밥이랑 먹다니, 소설 '대망'에서 젊은 오다 노부나가가 바쁠 때 말에 탄 채로 먹던 바로 그 음식이었을까? 일본음식이란 낫또와 우메보시만 피하면 얼추 입맛에 맞으리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된장 바른 주먹밥은 딱히 맛이 없는 건 아니었어도익숙한 맛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직접 담가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제품이 아닌 건 분명했다. 게다가빼죽하게 생긴 오이인 줄 알고 집어먹은 고야(여주)의 맛에찡그리는 나를 보고 작은 아이가 웃기 시작했다. 중국인 친구가 이걸로 엄마가 요리해 주면 몹시 싫었었다고 하더란다.
여주는 영어로는 Bitter Melon(쓴 멜론)이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혈당을 낮춰준다고 해서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오키나와에서 유독 많이 쓰이는 식재료였는지 여주를 주인공으로 한 캐릭터 상품도 간혹 눈에 띄였고 호시노 리조트의 오키나와 호텔 BEB5에는 여주 테마의 방까지 있었다. 가장 무난할 거라고 생각해서 주문한 소바는 멧돼지로 국물을 낸 오키나와 특유의 맛을 냈다. 냄새가 나거나 먹기 고약하지는 않았지만 늘 먹던 그 소바랑은 거리가 멀었다.
오키나와 BEB5의 여주룸
그러니까 사실은, 일본은 쉬운 여행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이드북은 물론, 수없이 쏟아지는 블로그며 유튜브 정보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이, 특히 한국인 여행자들이 몰리는 곳은 딱 정해져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어렵다. 그런데 어려운 것도 여행의 맛이 아니었나? 모르는 곳, 낯선 곳으로 호기심을 안고 떠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니까. 일본이라는 길고 큰 나라에서 오사카/도쿄/교토를 벗어나또 다른 일본으로의 길을 이 한 번의 저녁식사가 안내하고 있었다. 이리오모테섬은 또 얼마나 생소한 일본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긴장과 함께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