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40도의 폭염 속에서 퀘벡 성벽을 따라다니다가 햇빛을 피해 들어간 곳이 대포 박물관이었다. 전쟁 박물관도 아니고 대포 박물관. 정확히 말하면 대포 유적지(Artillery Park Heritage Site)라고 해야 하려나. 일단 에어컨이 아쉽기도 했고, 요새전엔 역시 대포지, 살짝 궁금하기도 해서 홀리듯이 들어간 곳에 마침 10분 후에 가이드 투어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가이드 외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누벨 프랑스 축제 시즌에 갔으니 성수기 중의 성수기고 올드 퀘벡 안에 관광객이 바글바글한데 왜 여기는 나 혼자란 말인가? 사람이 너무 많아 복잡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혼자라는 건 부담스럽다. 퀘벡(시티)에서 30년을 살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는 가이드와 퀘벡주(의 몬트리올)에서 20년 이상 살았어도 아직 관광객 모드로 다니는 여행자가 단둘이 어색하게 마주 서서 18세기에 지어진 커다란 건물 하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퀘벡은 북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곽도시이다. 현재의 퀘벡시티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퀘벡, 그러니까 퀘벡 구시가가 총 4.6km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퀘벡이 있는 다이아몬드 곶이 생 로랑(세인트 로렌스) 강을 향해 삐죽이 돌출되어 있는데, 강변으로는 낭떠러지이므로 퀘벡은 애초부터 천혜의 방어지기였고, 그래서 초기 정착지로 선택되었다. '퀘벡'이라는 이름 자체가 알곤킨족 언어로 '좁은 길' 또는 '해협'이란 뜻이다.생 로랑 강이 바로 이곳 퀘벡과 지금의 레비(Levis) 사이에서 좁아진다. 강은 뭍에서 바다로 흐르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서 넓어진다고 해야겠지만 대서양에서 배를 타고 오던 유럽인들의 눈으로봤을 땐 강이 급격히 좁아지는 이곳에 닻을 내렸다.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렝은 160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곳에 마을을 짓고 정착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제임스타운에 정착을 시도했지만 얼마 못 가 버려지고 지금은 폐허만 남은 것에 반해 퀘벡은 프랑스가 영국에 패한 이후에도 계속 성장해 지금은 퀘벡주의 주도가 되어 있다.
퀘벡과 르 퀘벡
퀘벡에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퀘벡이라고 하면 때로 퀘벡주를 말하는 건지, 주도인 퀘벡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불어로는 주(프로방스)의 이름일 정관사 le가 붙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데 영어인 경우엔 확실히 하기 위해 퀘벡시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퀘벡시티의 구시가를 돌아보고 있으니까 그곳을 퀘벡이라고 하자. 하여간 이 퀘벡은 샹플렝이 이곳에 마을을 짓고 살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로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나무를 깎아 담을 세웠던 것이 후에 영국이 점령한 뒤로는 미국의 추가 공격에 대비해 경비를 강화해 시타델(요새)까지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퀘벡의 오래된 성벽은 낭만적이고 고풍스럽게 보이기는 해도 사실은 방어기지의 유적이고 여러 차례의 전투로 상처받은 흔적이다. 그리고 이곳의 막사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현재의 캐나다로 주인이 바뀌면서 견뎌온 역사적인 군사시설이다.
바깥에서 보이는 부분이 실제 안의 공간보다 두 배는 크다. 적군에게 시설이 더 커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두꺼운 돌벽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가장 아래층은 프랑스 군인이 점거하던 시절을 재현해 놓았고 위로 올라갈수록 현대적인 전시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18세기 군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가를 볼 수 있다. 소박하지만 비교적 깔끔하다. 그중에 내 눈길을 끈 것은 장교로 복무했던 제임스 페티슨 코크번(James Pattison Cockburn)의 그림들이었다.
"시간이 많았나 봐요? 평화로운 시기였어서?"
농담처럼 물었는데 뜻밖의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기도 하고 본국에 보고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많은 그림들이 업무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사진이 없던 시절이니까 식민지 퀘벡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그림으로 영국에 보고해야 했다는 것. 그림과 현재의 퀘벡의 모습이 비슷한 곳도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왕립 사관학교를 나왔다는 장교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마 화가가 되고 싶었던 군인이었을까? 후대에 그는 군인 겸 아티스트로 기록되고 있다.
그럼 장교들은 어디서 생활했을까? 바로 옆, 원래는 빵을 굽던 집을 확장해서 관사로 삼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안에 들어서자 부엌이 보이고 거기에 장교 복장의 한 사람이 여기가 자기 집이라며 안내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
캐나다에 살다 보면 주변에 수염을 기른 남성이 꽤 많다. 그런데 간혹 너무 젊은 사람이 수염을 기른 모습을 보면 나이 들어 보이고 싶어서 애쓰는 것 같아 웃음이 날 때가 있다. 그래서 더 어려 보이는 상황이 사실은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수염이 나는데 그게 마음에 들면 기를 수도 있지, 그게 왜 애 같아 보일까? 생각해 보니 순전히 내 탓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내쪽이다. 고등학교나 마쳤을까 싶은 직원 하나가 콧수염을 붙이고 (자기 수염일지도?) 18세기 장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걸 보니 갑자기 현실감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옛날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건 늘 재미있다. 게다가 어려서 시골에서나 보던, 우리 집 마당에도 하나 버려져 있었던, 펌프가 부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게 최첨단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잘 보이는 곳에 설치했다고 한다. 옆방에는 중국 문양의 벽지가 붙어있다. 그때에는 고급 수입품이었다. 거기에 올려진 중국 스러운 화병 하나.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작은 집이지만 200년 전에는 꽤 유복한 집안이었을 그 집의 오래된 나무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면 목마와 장난감이 들어있는 아이들 방이 있고 소박한 침실이 있다. 거실에는 TV 대신 벽난로가 가운데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문득 가구만큼은 요즘 생활이 부럽지 않았구나 싶었다. 캐나다 살면서 이케아에서 산 MDF 가구를 조립해 쓰다가 망가지고 더러워져 버린 것이 몇 개인지...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가구라는 건 대를 이어 물려주는 큰 재산이었다. 가이드도 그 말에 수긍하며 원래 그 집에 있던 가구를 보여주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원목가구였다.
'대포 유적지'인 아틸러리 파크에 있는 대포는 모두 영국의 것이다. 작고 성능이 떨어지는 프랑스 대포는 모두 녹여서 재활용했다고 한다. 생루이(St. Louis) 문으로 들어가 역사 깊은 레스토랑이 즐비한 생루이 길을 걷다 보면 뿌리에 포탄이 하나 박힌 채로 자라는 유명한 나무가 하나 있었다. 이번에 가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안내판만 있었다. 안전문제로 2021년에 베어버렸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밑동마저 남지 않은 자리를 보니 못내 아쉬웠다. 퀘벡의 전쟁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 증인으로, '포탄나무'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일이 있는데 '포탄 나무(Cannonball Tree)'가 품고 있던 것이 사실은 포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759년 아브라함 평원의 전투 때 날아온 영국군의 포탄이 남아서 그 위로 나무가 자랐다고 모두들 오랫동안 믿고 있었다. 사실은 소이탄(Firebomb)이란다. 마차가 건물 모퉁이를 돌 때 건물을 치지 않도록 경계석 삼아 그곳에 놓아뒀었다는 것이다. 크기로 보아 영국군의 포탄이었을 거라던 그 동글이가 알고 보면 포탄이 아니었다는데, 포탄이거나 아니거나 퀘벡에 사는 우리들은 그 나무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성곽은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퀘벡의 역사지구를 지키고 있다. 본래 목적인 방어 대신 성문을 더 크고 멋있게 새로 지어 세계각국의 관광객들을 맞아들이고 있다.그러고 보니 프랑스인들의 개척정신을 계승하는 누벨 프랑스 (Nouvelle France) 축제에 와서 나는 왜 영국군이 주로 사용한 군사시설을 둘러보고 있었을까? 방문객이 혼자였던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진짜 퀘벡의 전쟁사를 보려고 프랑스가 오랜 대치 끝에 30분도 안 걸린 전투에서 영국군에 결정적으로 패배한 아브라함 평원으로 향했다.
* 화약을 보관하던 곳엔 그 터를 발굴하면서 발견한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주로 깨진 그릇조각이나 망가진 장난감 등이다. 그 시절에는 쓰레기통이란 게 따로 없이 필요 없어진 물건은 변기에 던져 버렸는데, 청소하는 사람이 찾아서 발견하면 가져도 되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들이 지금은 조심스럽게 유리장 안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