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푸른 산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자 유황 냄새와 함께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지옥계곡, 무시무시한 이름처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골짜기 곳곳에서 부글부글 끓는 물이 보였다. 이곳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도시 삿포로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온천이 많은 일본에서도 하루 1만 톤에 가까운 풍부한 온천수로 유명한 노보리베츠의 온천이다. 동화책에 나오는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었다. *
빨간 도깨비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무시무시한 외모 탓에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파란 도깨비가 제안을 하나 했는데, 자기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척할 테니 구해주고 친구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파란 도깨비는 빨간 도깨비의 소원을 들어주고는 이제 자기와 함께 지내면 사람들이 멀리할 거라며 떠나버렸다. (일본 동화 '눈물 흘린 붉은 도깨비')
피카추와 도라에몽의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만난 노보리베츠는 동화마을 같은 곳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아름답고 귀여운 동화가 아니라 '지옥'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엔 당연히 염라대왕이 있고 도깨비도 있으며 도깨비들을 물리치는 전설의 모모타로**도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같은 풍경이지만, 그래도 '지옥계곡'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무섭지 않은 도깨비 마스크처럼, 약간의 유황냄새와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살짝 겁을 줄 뿐이다. 한여름의 온천이라니, 때를 잘못 찾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푸른 산과 유황 계곡이 빚어내는 대비도 아름답고 아침저녁으로 그 사이를 거니는 산책이 즐거웠다. 게다가 운 좋게 불꽃놀이까지 볼 수 있었다. 호텔의 온천장에서 몸을 담그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투숙객들이 '하나비'를 보러 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어서 프런트에 물어보니 8시에 지옥계곡으로 가면 된단다. 그때가 8시 5분 전, 뛰어야지. 언덕배기를 숨차게 올라가다 지칠 때마다 조명봉을 휘두르는 행사요원들에게서 응원 아닌 응원을 받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자마자 둥둥 북소리와 함께 등장한 도깨비들은 곧이어 계단을 따라 늘어서더니 하나씩 커다란 불기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화려한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예쁜 것도 아닌, 그저 불꽃이었지만 강렬한 도깨비의 위엄 같은 강렬한 불기둥이어서 다섯 명이 한꺼번에 불을 뿜을 때는 모두 탄성을 질렀다. 노보리베츠의 밤에 그렇게 어울리는 공연은 또 없을 것 같은, 아주 특별한 ‘하나비(불꽃놀이)’였다.
도깨비불의 열기가 가라앉은 지옥계곡의 하늘엔 한창 차오르는 달이 떠올랐고, 나무로 이은 산책로엔 여행자의 길을 밝혀줄 등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특히 밤의 지옥계곡은 낮과는 또 다른 풍경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은은히 떠오르는 달빛에 비치는 계곡은 현실세계와 너무나 동떨어져서 생활의 고민이나 걱정을 한순간에 놓아버렸다. 여기저기에서 수증기가 올라왔다. 상기된 얼굴의 사람들을 지나, 나는 일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길을 따라 과거로, 꿈으로, 추억으로 걸어갔다. 마치 시간여행자가 된 것처럼.
* 도깨비를 일본에서는 '오니'라고 부른다. 어수룩하고 친근한 한국의 도깨비와는 엄연히 다르다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접한 도깨비의 모습과 성격이 비슷한 이들 빨간 도깨비, 파란 도깨비를 도깨비로 부르지 못한다면 몹시 서운할 것 같다.
** 다이이치 호텔의 도깨비방망이에는 뜻밖에도 모모타로가 들어 있었다. 원래는 모모타로가 시간 맞춰 나와 투숙객들에게 작은 구경거리를 만들어주었다는데 지금은 은퇴해서 어떻게 작동됐었는지 보여주는 비디오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모모타로는 말하자면 ‘복숭아동자'라는 뜻인데, 한 노부부가 냇물에 떠내려오는 복숭아를 건졌더니 그 안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 나중에 오니를 처치하기 위해 개와 원숭이, 꿩을 배에 태우고 떠난다는 내용의 설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