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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Sep 11. 2021

내 집 마련 체험수기

고시원에서 서울 아파트까지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릴 적부터 늘 서울을 향한 동경이 있었다. 서울에서 전학 왔다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 같은 반 친구 때문일까.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들이 죄다 서울에 있기 때문일까. 또는 서울에서는 좋아하는 연예인을 우연히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 때문인지도. 어쨌건 나는 성인이 되면 서울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서울에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취업하기 위해서는 면접을 봐야 했다. 거제도에서 400km를 넘게 달려와 면접을 보았다. 서울에 연고지가 없었기에 면접을 보러 다니는 동안 찜질방에서 머물러야 했다.


 직원 복지 차원으로 기숙사를 제공해 준다는 회사로 취직을 했다. 방이 세 개인 아파트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직장 선배 네 명과 같이 한 아파트에 살다 보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있었다. 차라리 작은 고시원에 살더라도 퇴근 후에는 혼자 편히 쉬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햇볕조차 들지 않는 고시원에 살아보니 삶의 질이 열악해졌다. 겨우 한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은 답답했다. 옆방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생생히 전해 들릴 정도로 방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늦은 밤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고시원에 들어와 겨우 씻고 잠만 자는 날이 많았다. 

    

 월급의 대부분을 저축했다. 월세 보증금을 겨우 마련해서 원룸을 구했다. 6평도 안 되는 작은 원룸이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행복했다. 하지만 딸린 부엌이라고 하기에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다거나 친구를 초대하긴 어려웠다. 여전히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여력이 된다면 더 넓은 집을 구해서 쾌적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친구를 초대해서 요리도 해줄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내 집이 없다는 것은 참 불편한 것이다. 취업을 하기 전에는 찜질방과 모텔을 전전했고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는 고시원에서 꽤 오래 살았다. 돈을 모아 원룸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다. 자금이 부족하다 보니 TV에서만 보던 옥탑방에서도 살아봤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곤 했다.

 내가 이사를 자주 다니는 것을 아는 주변인들로부터 왜 이렇게 서울에서 고생하며 사냐는 소리를 들었다.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게 낫지 않겠냐면서. 사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나도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 번도 다 같이 모이기가 힘들다. 나는 서울에서, 여동생은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막내 동생은 호주에서 지내다 병역 문제로 귀국했지만 제대 이후 창원에서 직장을 구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 가족은 명절에도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가까운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어야만 겨우 볼 수 있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엄마 혼자 거제도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20년 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해서 모아둔 돈에 대출을 받아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1,2,3층은 세를 주고 4층엔 우리 가족이 살았다. 

 이제는 자녀들이 모두 독립을 하였으니 엄마 혼자 넓은 4층에 사시는 것은 공간 활용도 면에서 비효율 적이다. 또한 무릎 수술까지 했던 엄마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 4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내내 마음에 걸렸다. 더욱이 조선 경기가 전과 같지 않아 세를 주던 방이 잘 나가지 않았다. 또 20년이 된 건물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공사와 수리를 하느라고 엄마가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서울에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지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거제도에서 살 수는 없었다. 장성한 자녀들이 거제도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선소에서 일하는 것 말고는 거의 없었다.

 서울에 집이 있으면 타지에서 일하는 동생들이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따져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이 한 달 주거비로 지출하는 돈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사는 월세를 합하면 대략 200만 원 가까이 되었다. 만약 대출을 받아 서울에 집을 살 수 있다면 매달 부담하는 원리금에 가까운 돈이지 않는가. 가족들이 당장 모여서 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미래를 위해서는 서울에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신혼집을 구할 테니까. 2년마다 이사하지 않을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관련 서적을 읽고 경매와 재개발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나에게 집은 주거 공간이자 재산이고 동시에 미래의 삶이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아파트 장만하기!’ 당차게 쓰고 큰 소리로 읽어보았다. 

 20살 때부터 가입했던 청약통장으로 청약 신청도 했다. 하지만 아직 미혼이고 나이가 삼십 대인 나에게 분양 당첨이란 요원한 일이었다. 차라리 집을 구하기 위해서 돈을 더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쉬는 날엔 알바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연봉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직장과 알바를 병행하며 저축을 했으니 내 집 마련을 꿈꿀 수 있는 최소한의 밑천 정도는 될 것이라 여겼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자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펜데믹 이후 부동산 자산 가치가 증가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거 없이 일을 더 많이 했지만 늘어나는 연봉보다 집값은 늘 저만치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집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집을 구하는 데 있어서 나보다 부동산에 안목이 있는 사촌 언니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 모여서 살 수 있으면서 훗날 신혼집으로도 쓸 수 있는 곳. 투자가치가 있으면서 여차하면 임대를 줄 수도 있는 그런 아파트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물론 서울에서 내가 가진 자금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 강의를 들었던 선생님께 조언을 받고, 사촌 언니와 함께 발품을 팔아 추천받은 집은 관악구에 있는 아파트였다. 가파른 언덕길에 위치해 있었고 거의 40년이 다 된 낡은 아파트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가진 자본에 비해서는 너무 비쌌다. 무리를 해서 살 수는 있지만 대출금을 갚느라고 내 미래를 송두리째 집에 저당 잡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언니가 뉴스 기사를 보내왔다. 올해 7월부터 한국 주택금융공사에서 40년 초장기 모기지론이 시행된다는 것이다. 나는 무주택자였기 때문에 실수요 혜택을 받으면 집값의 70%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다. 낮은 금리로 40년 동안 저축한다는 생각으로 갚아나가면 어쩌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주인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집주인의 아들이었다. 하루하루 치솟는 매매가에 집을 팔려고 했던 집주인의 아들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내가 구매할 의사를 보이자 매매가를 순식간에 4천만 원이나 올렸다는 사실을 부동산을 통해 전해 들었다. 예산을 크게 초과했기 때문에 그 가격으로는 도저히 아파트를 살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반차를 내고 집주인을 찾아갔다.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러 이쁜 화분을 사들고 무작정 집주인이 사는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 아파트를 분양받아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는 집주인 할머니는 걱정했던 것보다 인상이 좋으셨다. 

 혼자 이 아파트에 사시는 할머니는 자녀들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자녀들 곁에서 지내고자 집을 내놨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께 내 소개를 하고 10년 동안 서울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 드렸다. 그리고 집주인 할머니께서 자녀들과 함께 살고 싶어 지방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것처럼 나 또한 뿔뿔이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기 위해서 이 집이 꼭 필요하다는 상황을 어필했다.

 할머니는 자녀들과 상의해보고 연락을 주신다고 했다. 나는 부동산에서 할머니의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세 시간 후 연락이 왔다. 할머니와 나는 서로가 생각했던 집값의 가격을 조금씩 양보하기로 동의했다. 그리고 그날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크고 비싼 것을 사는 날이었다. 나와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될 아파트를 구매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서울에 있는 집을 사려면 자금조달 계획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통장에 저축했던 예금 잔액 증명서, 주식거래 증명서, 그리고 한국 주택금융공사를 통해 신청한 초장기 모기지론 대출금을 기재했다. 그럼에도 조금 부족한 자금은 엄마한테 빌렸다. 엄마한테 빌린 돈을 어떤 식으로 갚아나갈 것인지 내용을 적시한 차용증을 쓰고 인감증명서까지 덧붙였다.


 부동산 계약을 하고 잔금을 치르는 동안 매매시세가 1억이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부럽다고 했지만 사실 내 상황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그저 소중한 보금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의지가 매우 커진 것 같다.

 잔금을 치르고 나서 그동안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떡을 돌렸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가능한 모든 주거형태에서 살아본 나로서는 내 집 마련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마련한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본다. 끝으로 저금리로 대출을 해준 한국 주택금융공사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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