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급의 문장은 저 멀리로.
어제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요즘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한 음식만 먹고 사는데 별일 없겠지 하며 빈 마음으로 갔다가, 무거운 어깨로 돌아왔다. 갑상선에 2.1cm 정도 되는 혹이 있는데 모양도 고르지 않다고. 다른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몇 주 전 본 사주에서 나더러 상반기에 병원에 갈 일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그 일인가 싶었다. 사주가 생각보다 들어맞고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 미신으로 치부했던 일들에 괜히 의미를 부여해보기도 하고, 뭐 태어난 김에 한 번쯤 대학병원도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나 자신에게 괜히 쿨한 척 굴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회사에 와서 처음 건강검진을 했을 때, 갑상선 추적검사를 권유한 결과지를 받아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것도 2년 전 여름이었는데,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깜빡 잊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때, 혹이 크지 않을 때 검사를 미리 받았더라면 지금처럼 싱숭생숭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를 자책하는 말들이 머리를 채우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몸에 기운이 너무 없었다. 어제는 오전 내내 공복이었고, 비수면 내시경이 뭔지도 모르고 덤볐던 터라, 몸이 깜짝 놀랐을 테니 기력이 없어도 그러겠거니 했겠지만, 오늘도 힘겨운 게 새삼 억울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지금 억울할까?
먼저 2년 전 왜 병원을 가지 않았을까, 나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내놓을 답은, 지난 2년 동안 내가 내 삶에서 1순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젊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탓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아픈 이들과 그리 먼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닌 내가 그리도 나에게 무심했던 이유는, 그간 남들의 눈에 맞추는 데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이젠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거다’라는 말을 내 입에서 떼어내려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가 한밤중을 가르킬 때까지, 방구석에 앉아 컴퓨터와 씨름하던 삶을 살 때 "그래도 너는 회사가 재택근무를 시켜주지 않느냐", "그래도 너는 대놓고 너의 얼굴 앞에서 비난하는 상사는 없지 않느냐"는 남들의 말로 나를 위로하곤 했다. ‘그래 이 만큼 월급 받고, 이 만큼 똑똑한 사람들이랑, 이 만큼 일할 수 있는 게 어디야’라며. 날 책임져줄 리가 전혀 없는 그 말들로 나를 왜 위로했을까. 아픈 건 아픈 거고, 상처가 났으면 치료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미련하게 내비둔 건, 이런 남들의 말을 내 말보다 앞서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라는 말은 결국 비교급의 문장이다. '이만하다'를 정의할 비교점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이 둥둥 떠다니는 글자에 불과하다. 반면 '나는 이런 말에 상처를 받았다’ '지금 내 몸이 버틸 수가 없다', 등의 말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사실이다. 다른 상황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 몸이 그렇게 느끼면 나는 지금 그렇게 아픈 거고, 피곤한 거다. 그리고 내 주변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남들의 고통과 아픔에 내가 온전히 공감할 수 없듯이, 그들도 내겐 마찬가지다.
그러니 앞으로는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생색 내면서 살아 볼란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내게서 멀리 밀어보내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들만 끌어당길 거다. 세상은 내가 조금 더 싸가지 없어진다고 무너지진 않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