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i): 꿈을 꾸었다.

by 지인

2일 - (i)


꿈을 꾸었다. 몇 년 전에 헤어졌던 남자가 나왔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다 나가는데 3~4줄 건너편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남자를 보았다. 회의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다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이 넓은 회의장에 내가 있다는 걸 그 사람이 분명히 안다는 게 느껴졌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라는 목소리가 들려 쳐다봤다. 아. 한눈에 너의 연인이라는 걸 알았다. 너와 어울리는 단아하고 총명해 보이는 여자구나. 미소를 머금고 여자가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남자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텅 빈 회의장에 서서 자신이 방금 전에 앉았던 의자만을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여전히 친근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남자와 어울리는 여자였다. 좋은 여자같았다. 텅 빈 회의장에서 나, 그 남자, 그 여자, 이렇게 셋만 있었다. 여자는 회의장에 놓여있는 수많은 의자들을 제치고 나에게 다가오고 싶어 했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렇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생전 처음 자 본 찜질방. 내가 눈 뜬 장소는 찜질방 내 여자 목욕탕 캐비넷 구석에 마련된 조그마한 수면 메트 위였다. 내 옆에는 알람을 맞춰 놓은 핸드폰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알람이 울릴 시간도 아니었다. 캐비넷 건너편에 희미한 불빛과 밤을 샜거나 아니면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부지런한 여자들이 목욕탕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찜질방에서 잠을 잔 손님은 나 1명이었다. 나머지 3명 중 1명은 입장권 받는 아줌마, 그리고 2명은 때를 밀어주는 직원들이었다. 허리가 으드득 거렸다. 그 남자 꿈을 꾼 건 오랜만이었다. 완벽하게 잊고 있었는데. 넌 아직도 그 세계에 있는 모양이구나. 곧 결혼을 하는 건가?



알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조금 더 잘까 했는데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시꺼멓다. 이 공간은 찜질방에서 자는 여자 손님들이 남자 출입도 잦은 찜질방에서 불안할까봐 목욕탕 안쪽에 따로 마련한 공간이라고 했다. 10cm 정도 하는 메트리스 3개 깔려 있었고 베개도 있었다. 그 주변을 ㄷ 모양으로 안쓰는 캐비넷으로 가려 빛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했다. 덥지는 않았지만 코로나때문에 손님이 없어서인지 생생한 에어컨 바람을 기대한 나에게는 조금 후덥지근했다. 그래도 어제처럼 가만히 서 있어도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숨이 턱턱 차는 바깥보다는 나았다. 일어났다.



설사는 하지 않았고 토하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어제같은 날씨에는 산책도 안하는데 그 땡볕에서 7시간을 내리 일했으니, 몸이 놀란 것 같았다. 팔토시를 입고 있지 않아 아픈 허리와 다리보다 양팔이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썬크림 성능이 좋은 건지 탄 흔적도 없었고 붉은 화상기도 없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정수기 물을 마시고 찜질방에 있는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내가 가지고 온 썬크림을 바르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다행히 칫솔과 치약은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샴푸나 기타 샤워 시 필요한 물건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걸 새로 사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전 날 저녁 찜질방을 결제하고 목욕탕에 들어가 라커 안에 가방을 넣은 후 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옷을 벗고 바로 목욕탕에 들어가 그 안에 늘 있는 하얀 비누로 요즘 군인들도 안한다는 비누 하나로 머리 감고 얼굴 몸 닦기를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뜨뜻한 물이 좋았다. 몸 여기저기에서 갈색 물이 흘러나왔다. 아무 옷도 가지고 오지 않은 나에게 깨끗한 찜질방 옷은 실크 잠옷같았다. 머리도 말리지 않고 찜질방에 있는 스킨과 로션을 바른 후 절뚝거리며 누울 곳을 찾는 나를 보자 입장권을 체크하는 직원 아줌마가 빛이 차단되어 있고 메트리스가 있는 목욕탕 내 잘 곳을 알려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바로 잠에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난 덕에 다시 땀과 퇴비로 뒤범벅이 된 옷을 입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단 하루만에 ‘마음의 출렁거림’이 사라져 스스로의 결단력과 실행력에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자유는 강한 규칙성과 규율에서 나온다는 누군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생활이 쉬는 날 없이 매일 반복된다면 사람은 부서질 테지만, 일단은 며칠 전에 느꼈던 마음의 출렁거림이 다시 단단한 무언가로 변해 앞으로 나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약속 시간 2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농가주와 농가주 부인이 있는 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밝게 인사를 하고 차에 앉았다. 차에는 큰 농부 모자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속옷과 함께 팔토시도 사준 부부였다. 물론 모자도 팔토시도 내가 개인적으로 챙기는 게 아니고 다 그대로 놓고 떠나겠지만, 그 배려심에 감사했다. 인사를 하고 바로 모자를 쓰고 팔토시를 감았다. 농가주 부인은 곧이어 내려서 오늘 추가로 올 사람들을 픽업하러 갔고, 농가주는 나를 태우고 바로 이어 어제 봤었던 지체2급이라는 어머님을 픽업해 어제 오후에 일했던 감자밭으로 향했다. 날씨가 어제보다는 서늘했다. 좋은 징조였다.




그러나 결국 이 날 경찰이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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