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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이 Jan 09. 2023

머니의 법칙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다는 것의 의미

서울로 독립을 하던 날이었다. 추운 12월이었고, 이삿짐 트럭 조수석에 엄마와 나는 끼다시피 타야 했다. 불편해서 잘 수도 없었던 우리는 서울로 가는 세 시간 내내 신나게 떠들었다. 소곤소곤 말하다가도 이야기에 흠뻑 취해 떠들다 보면 어느새 깔깔대고 있었다. 아마 우리 목소리를 그래프로 그린다면 최고점과 최저점을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요동쳤을 것이다. 귀가 아프셨을 기사님께 이제야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내가 겪은 이사의 장면에는 늘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아빠는 마음대로 쉴 수 없고, 동생은 야자를 하고 있거나 부산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앞 원룸으로 시작해서 기숙사, 취업으로 인한 독립까지 모든 이사를 우리 둘이서 했다. 짐을 싸고, 풀었다. 풀었다가 다시 싸기도 했다. 1인분의 몫일지라도 한 명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채우는 것은 둘이 하긴 버거웠다. 작은 차에 테트리스 하듯 짐을 쌓았다. 빈 공간에 조각을 끼워 맞출 때는 퍼즐 같기도 했다. 엄마는 이사를 하면 다음날 온몸이 쑤신다며 힘들어하고는 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보따리장수 마냥 집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나에게 엄마는 힘드니까 이제 다시 들어오지 마-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라고 덧붙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는 걸 엄마는 알까. 서울이라는, 우리에겐 너무 멀기만 한 미지의 도시에서도 난 힘들지 않은 멋진 사람이고 싶어서.




얼추 이사가 마무리된 밤에는 엄마와 치킨을 먹었다. 고된 노동 후라 맥주도 빠질 수 없었다. 새로 나온 감자튀김이 버무려진 치킨이었는데, 우린 맛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허겁지겁 잘도 먹었다. 작은 원룸에서 엄마와 치킨과 맥주를 먹는 그 순간은 날 것 그대로였다. 그래서 좋았다. 나름 꽤 해봤다고 생각했던 이사도 이렇게 멀리, 게다가 자가용 없이 하는 이사는 처음이라 또 새로웠다. 좁은 공간에서 같이 자야 하는 것도 걱정보다는 할 만했다. 엄마는 서울에 와본 지가 언젠지- 말하면서도 다음 날 구미로 내려갔다. 이틀 밤 자기로 해놓고, 다음 날 내려갔다.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하면서, 다음 날 내려갔다.


 엄마를 서울역에 데려다주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하철이 낯선 엄마와 함께 서울역에서 내려 긴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이나 타고 기차 앞까지 왔다. 엄마는 서울은 기차가 빨리 와 있어서 좋네,라고 말하며 기차에 탔다. 내 눈동자는 데굴데굴 굴러 자리를 찾는 엄마를 따라갔다. 기차는 아직 출발도 안 하는데 얼른 가라고 손짓하는 엄마가 서운했다. 그래서 눈물이 조금 났다.


 사실 그건 거짓말이다.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이 났다. 또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취업을 한 것도 아니고, 뾰족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무작정 서울로 간다 했을 때 엄마는 무심하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서울 살아보고 싶어 했잖아,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안다. 괜찮겠어? 꼭 가야 해? 라며 계속 물어봤으니까. 멀리 서울까지 와서 힘들게 일만 하고 간다는 사실이, 전세 계약금도 아빠한테 빌린 내가 엄마에게 밥 한 끼 못 사줬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났다. 내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눈치도 없이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황급히 옆에 있는 기둥 뒤로 숨어 소매로 눈을 벅벅 문대고 다시 나왔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누가 보면 신파 영화 찍고 앉았네, 생각할지도 몰랐다. 엄마는 계속 가라고 손짓했고, 나는 발바닥에 못이 박힌 듯 서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떠날 때까지 계속, 계속 흔들었다. 한참 지나고야 동생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엄마는 내가 우는 걸 보고 기차에서 울었다고 했다. 승강장에 사람도 많았고 그때 난 모자와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엄마가 모르는 줄 알았다. 동생은 박수까지 치면서 웃어댔지만 나는 또다시 어금니에 힘을 주어야 했다.


기차가 떠나고, 낯선 도시에 남겨진 나는 두려웠지만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퇴사 후 거짓말처럼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내가 살던 도시 대구를 그야말로 유령도시로 만들어버렸다. 늘 사람으로 넘쳐나던 시내 한복판에 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무서워서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여파로 계속해서 취소되는 면접과 희미해지는 촛불처럼 사그라드는 의지. 이후 초조했던 나는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오로지 뗏목 하나에 의지해서 어딘지 모를 육지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어디로든 가야 했다. 그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령 도착하는 곳이 무인도일지라도.


 서울로 와서 집은 생겼지만, 돈은 사라졌다. 사실 전세니까 내 집도 아니었다. 돈과 외로움은 아주 반비례했다. 아마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돈이 없을수록 외로움은 커져갔다. 다만 돈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외로움이 커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역병이 창궐한 시대라고 해도, 지방보다 서울이 조금이나마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로 가도 한양으로 가면 된다던 옛말은 새빨간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해도, 살면서 웬만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 좋아하는 장소인 영화관, 좋아하는 카페 모두 돈이 없으면 볼 수도, 갈 수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몇 없는 아르바이트는 그나마도 일주일에 이틀, 하루에 세 시간 이런 식이었다. 그마저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난 내가 불쌍했지만 동시에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새 옷을 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큰맘 먹고 배달 음식을 시켜놓고는 깨작거리며 일주일 내내 아껴먹고는 질릴 대로 질려 다신 시키지 않았다. 매일 마시던 커피도 끊었다. 마트에 가면 세일 상품이나 유통기한 임박 상품만 샀다. 추우면 보일러를 켜는 대신 옷을 입고 양말을 신었고, 교통비가 아까워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종종 친구들한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코로나 때문에 나가기 무섭다고 거짓말했다. 코로나가 도움이 되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아주 가끔은 너무 외로운 나머지 친구를 만나고 더 아꼈다. 중고 거래 앱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팔릴 만한 건 전부 올렸다. 매일 눈을 뜨면 이 시간도 금방 지나갈 거라고 중얼거렸지만 ‘금방’이라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일상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날 더 짜증 나게 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SNS에 거짓말을 했다. 나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행복하고, 여기 너무 좋네. 역시 혼자 사니까 좋아. 나 바빠, 원래 백수가 제일 바쁜 거 알지? 다음에 한번 보자. 나는 텅 빈 선물 상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잔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거짓말은 스스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자주, 가장 달콤하게, 추한 모습은 외면한 채 기꺼이. 나중에 여행 가야지, 나중에 운동 등록해야지, 나중에 친구들 밥 사줘야지, 동생 용돈도 주고, 나중에 노트북도 사고 싶네.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난 나중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단어만 중얼댔다. 지금이 그 나중인데.  


 난 여전히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 나아갈 방향을 몰라 노도 젓지 않은 채 하늘만 보며 멍하니 누워있다. 누군가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냥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이겨내고 싶다. 아니.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고 싶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더라도 잘 싸워보고 싶으니까. 너무 힘들면 줄행랑이라도 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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