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끝 날이다.
8월에 미련 없음. 잘 가라는 말도 하기 싫음. 다시 보자는 말도 하기 싫지만 그건 안 될 말이고. 왜냐면 그래도 아직은 더 살고 싶은 날들이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오는 8월을 볼 수밖에. 오뉴월에는 아무리 반가운 손님도 3일이 되면 가주길 바란다지. 나도 오늘 하루 남은 8월의 달력을 오뉴월 손님 보내듯 미리 당겨서 시원하게 쫘악 찢어버렸다.
시원하다.
이렇게 가는 세월에 미련이 없을 수 있다는 것도 난 알았네. 가는 세월 붙들고 싶은 맘 일 푼어치도 없다. 아무리 뒤집고 또 뒤집어 봐도 징글징글한 8월의 8자였다. 이젠 무더위도 안녕이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참 힘든 올여름이었다. 두 고기압이 어쩌고 저쩌고 해서 더웠다지만 앞으로 다가올 날들도 결코 만만치 않겠지. 그래도 가는 날들은 어김없이 가고, 들판에 벼들은 군소리 없이 익어가고, 온갖 자연은 순응할 뿐이다. 인간만이 원인을 제공하고 마땅한 결과에 투덜거릴까? 숲이 아닌 빌딩이 가득한 도심의 거리들은 온갖 열기를 토해내는 배기팬 소음과 함께 열기로 숨이 컥컥 막힌다. 건물 안에서는 춥다고 긴 팔을 입고, 밖은 찜통이 따로 없는 희한한 세상에서 우린 살아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떼창을 부르던 매미 소리도 조용하고, 풀벌레 소리만이 한낮의 고요 속에 간간이 들려온다.
난 더위에, 코로나에, 거기에 개인적으로 터진 업무 속에서 진이 다 빠졌다. 내가 입에 달고 사는 지랄총량의 법칙처럼 그동안 일 안 하고 산 세월 어르신이 되어서라도 기어이 감당해야 되는 모양이다. 며칠 전엔 아들과 치킨 한 마리 먹으면서 아들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린다. 그러다가 트로이 영화 끝 부분을 우린 시청했다.
아들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리더로서 멍청했단다. 트로이 영화의 대충 줄거리는 고대 그리스 트로이의 둘째 철부지 파리스 왕자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와 사랑에 빠져 전쟁은 시작됐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브래드 피트 못지않게 멋졌고 용감해서 인기를 얻은 첫째 왕자 핵토르의 인간미가 참 돋보였던 영화로 기억된다. 왕인 아버지에게는 너무도 용맹하고 효심 지극한 아들이었고, 한 여인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성실한 멋진 남편이었고, 철부지 동생에게는 든든한 형이었다. 우리 아들은 이 영화를 보며 그 늙은 왕이 거대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온 잘못을 했다는 거다. 난 아들의 얘기에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이 늙은 왕도 젊어서는 누구도 성에 침입할 수 없도록 천연의 요새를 만들고 한 나라를 잘 다스리지 않았겠는가? 왕도 세월과 함께 백발만 찾아왔겠는가! 흐려진 지력도 무뎌진 총기도 함께 찾아왔겠지.
그래도 문제만을 일으키고 걸핏하면 아버지와 형의 뒤로 숨던 철부지 왕자가 성이 함락되고 난 뒤 비밀 통로로 도망가지 않는다. 헬레나 여인에게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며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산다는 건 이렇게 문제에 직면하는 게 최선일까?
철부지 왕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전설적인 인물인 용사 아킬레스와 맞선다. 천하에 둘 도 없는 무적의 아킬레스는 사랑하는 여인 여사제를 구해내려는 과정에서 파리스 왕자의 화살에 맞고 최후를 맞는다. 그래서 이후로 발 뒤꿈치 부분이나, 약점을 얘기할 때 '아킬레스'라는 말이 유래하게 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