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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Mar 13. 2022

드로잉

진짜로 본 것들

작년 여름, 존 버거의 『풍경들』을 읽다가 이거다 싶었던 구절.

“예술가에게 드로잉은 발견이다. 그저 입에 발린 미사여구가 아니라 정말 글자 그대로다. 예술가로 하여금 눈앞에 있는 물체를 쳐다보고 마음의 눈으로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드로잉이라는 실질적인 행위다.
… 선 하나, 색조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봤는가를 기록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보도록 이끌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 우리가 그린 윤곽은 더는 우리가 봤던 것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된 것의 가장자리를 표시한다.”

존 버거,『풍경들』,「모든 그림과 조각의 기초는 드로잉이다」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린 지 10년이 되어간다. 10년 중 그림을 그리지 않은 시간이 훨씬 많지만 햇수를 따져보니 벌써 그렇다. 20대 중반에 들어간 패션스쿨을 중퇴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몰두할 거리를 찾으려 시작했다. 그때는  캔버스, 아크릴 물감을 사서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어설프지만 완성을 한 것만으로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뭐든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관찰하고 상상하며 조금은 집요하게, 꾸준히, 끝까지.

왼쪽 Marc Chagall, <Window in the country>. 1915, 80x100cm 사진출처: www.marcchagall.net / 오른쪽은 내가 그린 것

대체로 좋아하는 것들을 그린다. 에딩펜이나 연필로 드로잉을 하거나 색연필로 색칠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가족, 마음에 드는 풍경, 꽃, 나무 등. 작가들 드로잉 따라 하는 것도 재미있다. 무언가를 보고 사진을 찍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많이 다르다. 저 모습을 남겨두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어떤 장면을 보고 내 마음이 일렁인 순간까지 남겨야지 할 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 그 대상을 계속 관찰하게 되고 그 대상을 생각하게 된다. 노쇠해진 우리 집 강아지를 그릴 때면 눈물이 난다. 눈으로 그 아이를 훑으며 펜 끝으로 옮길라 치면 군데군데 하얗게 변해 있는 갈색 털, 조금 휜 듯한 다리, 흐려진 눈동자가 자세히도 보인다. 다 그리고 나면 나는 우리 개를 더 사랑하게 된다.


화가들의 드로잉도 좋아한다. 그중 최고는 화가 이중섭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린 그림들이다. 그 선들은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여 이중섭의 마음이 되었다. 그는 가족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고 다수가 남아 책으로 엮이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편지지 윗부분에 달과 해가 그려져 있고, 왼쪽 테두리에는 화가 아빠가 부인과 두 아이를 그린 그림이, 오른쪽 테두리에는 네 가족이 어깨동무를 하고 동그랗게 모여있고 그 아래로 붓 - 그림 - 팔레트가 차례로 그려져 있는 편지였다. 편지 내용에는 화가로서의 자신감, 의지가 담겨 있다. 그가 부인을 뮤즈로 삼아 창작을 이어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나는 그 편지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하나의 사랑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표현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이중섭 저/양억관 역『이중섭 편지』

작년에는 애인이 쓰던 아이패드를 물려받았는데 이후로 그걸로 그림을 주로 그린다. 아이패드+애플 펜슬 사용 이후로 그리기 도구, 감각이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 듯한 경험을 했다. 이를테면 애플 펜슬로 닫힌 도형 하나를 그리고 나서 컬러 팔레트에서 색을 골라 도형 안으로  끌어오면  안이 색으로 채워지는 것이나, 선을 하나 그린 후에 펜을 화면에서 떼지 않고   있으면 매끈한 직선으로 변하는 그런  말이다.  아이패드 그림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우리 동네 김장철 풍경이다. 내가 사진으로 찍어둔 것을 그리는 중이다. 오래된 빌라 앞에 대형마트에서 가져온 듯한 빨간 카트가 세워져 있고 안에   다발이 들어 있다.   작은 화단에는 국화꽃이  뭉치 피어있고 국화 바로 옆에는 구멍이 많은 노란 플라스틱 박스가 있다. 누군가의 개인 텃밭일 테다. 입구 옆쪽에 있는  공간에는 누군가 시래기를 말려놓았다.  빌라 앞엔 항상 할머니 서너 분이 앉아 계시는데 그분들이 임자일  같다. 새것 하나 없는 풍경에 빨간 카트-노란 플라스틱 박스-하얀 국화의 색채 대비가 뚜렷해서 이질적인 느낌이 들며 자꾸 눈이 간다. 드로잉은 거의 끝냈는데  색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된다.


과거 일을 글로 쓰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을 내 시선으로 다시 배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드로잉의 장점도 비슷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자기 전까지 계속 무언가를 보지만 내가 보았다고 인지하는 것은 내 눈이 실제로 본 것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 와중에 그릴만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의지는 실제로 보고도 흘려버린 것을 붙잡는 일이다. 그것들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늘려주는 것이다. 내 삶에서 '나'가 너무 크면 괴롭다. 나 말고 내 주위 것들을 더 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은 나를 여유롭고 건강하게 한다. 그러니 내 주위가 더 넓어지면 그것도 더 좋을 일이다. 더 많은 것들을 귀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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