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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May 29. 2022

막 물 댄 논의 밤

한밤중에 마주하는 완벽한 순간

나는 모내기 직전의 논을 좋아한다. 늦봄 즈음이다. 그때 논에 가면 널따란 땅에 야트막하게 물이 채워져 있다. 잔잔한 수면 위는 주변의 풍경을 그대로 비춘다. 산이 있는 곳엔 산이, 때로는 맑은 하늘의 구름이 번지기도 한다. 노을 질 때는 붉은 주홍빛으로 논이 물든다.

작년에 군산에서 이런 풍경을 처음 보았다. 내가 있던 동네는 군산 서쪽에 있는 옥서면이었다. 평야가 많은 동네로 보리농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내가 살던 집에는 대문이 두 개 있었다. 차랑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로 통하는 문, 마을의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쪽으로 통하는 문. 후자의 문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걷는다. 그러면 오른편에 집이 하나 더 있고, 이어서 그 집 텃밭이 기다랗게 나있다. 텃밭이 끝나는 지점엔 전봇대가 있고 뒤로 밭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서너 걸음 더 걸으면 양쪽으로 논밭이 쭉 펼쳐진다. 길은 트럭 한 대가 지나갈만한 너비다. 운동장처럼 넓은 논밭 5개 정도를 지나면 사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가면 차가 다니는 도로로 연결된다. 왼쪽으로 통하는 도로는 왕복 4~6차선의 국도이고, 오른쪽으로 통하는 도로는 왕복 2차선이다. 2차선 도로 너머엔 저수지가 있다.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오른편으로 논밭이 7개 정도 있다. 여길 전부 지나면 옆 마을이다.


밤의 논은 아담하게 출렁이며 주위의 온갖 빛을 모은다. 출렁임은 바람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작은 생명들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논에 머무는 생명의 존재감은 낮보다 밤에 더 크다. 짝을 찾는 개구리들 때문이다. 개굴개굴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밤하늘의 별까지 반응하는 듯 유난히 반짝반짝거린다. 우리 동네 논은 내 눈에 너무나 특별했다. 논 양 옆에 있는 도로의 가로등 때문이었다. 새카만 밤에 가로등이 켜지면 도로를 기준으로 가로등 빛이 데칼코마니처럼 논의 수면 위에 그대로 반사된다. 새카만 어둠과 새하얀 빛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개구리들은 귀를 채운다.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밤공기를 맡으며 걷는다. 모기님들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이라 맘 놓고 순간을 만끽한다. 걱정이나 고민이 들어올 틈이 없다. 내가 경험한 완벽한 순간 중 하나이다.

완벽한 순간이란 뭘까?

지금-여기에 온전히 몰입하는 찰나? 그런 건 주위 환경이랑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거슬리는 것 없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렇담 자연에 둘러싸여 있을 때? 논과 가로등은 자연은 아닌데?

그렇지만 개구리가 봄에 논에서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로등이 논의 수면에 비치는 빛의 반사 현상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밤이 어두운 것, 그래서 밝은 빛과 대조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과 자연이 만나서 아름다워진 풍경을 나는 우연히 만난 것이다. 물이 대어진 논도, 가로등도  자체로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그렇지만 아름다워질 수 있다. 무엇과 혹은 누구와 어떻게 만나냐에 따라서.

두 눈과 마음을 열고 물처럼 흘러 흘러 사는 보람을 여기서 찾는다. 이런 완벽한 순간이 내가 가진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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