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연 Jun 14. 2022

수프

따뜻하고 든든한 나의 무기

내 생애 첫 수프는 경양식집에서였다. 돈가스와 함께 나오는 크림수프. 가공식품 맛이 물씬 풍기는 그 수프는 후추를 톡톡 뿌린 후라야 맛의 정점에 도달한다. 맛도 맛이지만 음식이 나오기 전에 수프가 나오면 그게 참 신이 났다. 나름 코스요리가 아닌가. 돈가스를 시키면 애피타이저로 수프가 나오고 본식이 등장하니 말이다.

이제 수프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종류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계기는 프랑스에 놀러 가 먹은 어니언 수프이다. 파리에 도착한 날 숙소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어니언 수프를 시켰다. 낮은 원통형에 깜찍한 손잡이가 있는 그릇에 수프가 담겨 있었고, 곁들여 먹는 바삭한 바게트 몇 조각이 함께 나왔다. 수프 위에 뿌린 치즈가 먹음직스럽게 녹아 있고 일부는 그릇에 흘러내려 끝이 살짝 타 있었다. 자기로 된 그릇은 음식을 웬만큼 먹을 때까지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주었다. 양파 단맛에서 나오는 풍미가 엄청났던 걸로 기억한다. 된장찌개와는 다른 구수한 고향의 맛이었다. 그 고향이 내 고향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향의 맛이었다.


지난달에 엄마 앞으로 제주도 토마토 한 박스가 선물로 들어왔다. 제철이라 그런지 유달리 맛있다. 그걸로 주스도 만들어 먹고 샐러드에도 넣어 먹고 콩국수에도 넣어 먹는다. 토마토 수프도 만들었다. 내 식으로 간단하게. 냉장고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 레시피도 다르다. 혼자 먹을 때는 비건식으로 요리하기 때문에 버터나 우유, 치즈는 생략이다.

올해의 토마토 수프 레시피. 양파는 채 썰고, 당근은 깍둑썰기, 토마토는 껍질을 벗겨 8 등분한다. 양파를 투명해질 때까지 기름에 볶다가 당근과 토마토를 넣는다. 다 같이 5분 정도 더 볶는다. 소금, 후추로 간하고 이탈리아 시즈닝, 바질 가루를 넣어서 잘 섞는다. 콩국수에 넣는 콩물을 넣는다. 이후 중약불에 10분 정도 뭉근하게 끓인 후 믹서에 간다. 곱게 갈렸다 싶으면 다시 팬으로 옮겨 와 10분 정도 더 끓이면 끝. 그릇에 담아 올리브유, 파슬리를 뿌려 먹는다.


감자 철엔 감자수프다. 우리 집은 포슬포슬한 삶은 감자를 좋아해서 감자 철이 되면 박스로 사다 놓는다. 주말에 가족들이 집에 모두 있는 날이면 엄마는 스텐으로 된 삼발이 찜판이 꽉 차도록 감자를 삶는다. 삶자마자 다들 신나서 먹어도 반 정도가 남는다. 식은 삶은 감자는 인기가 없다. 그 상태로 하루가 흘러가면 찬밥보다 더 못한 신세가 된다. 이때 감자수프를 만들면 좋다.

양파는 채 썰고, 감자는 껍질을 벗겨 깍둑썰기, 대파는 송송 썰고, 마늘은 조금 빻아 둔다. 양파를 투명해질 때까지 기름에 볶다가 감자, 대파, 빻은 마늘을 넣고 함께 볶는다. 서로 향이 배었겠다 싶으면 내용물이 자작자작 잠길만큼만 물을 넣고 소금, 후추, 이탈리아 시즈닝을 뿌리고 약불에 15분 정도 끓인다. 두유나 귀리 우유를 넣고 5분 정도 더 끓이다가 믹서기에 간다. 곱게 갈렸다 싶으면 팬에 옮겨와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그릇에 담아 잣과 파슬리를 뿌려 먹는다.


단호박 수프도 아주 간단하고 맛있다. 단호박을 깨끗하게 씻어서 통째로 냄비에 넣고 삶는다. 당근도 깍둑썰기 해서 같이 넣어준다. 단호박이 익었으면 꺼내서 썰어 당근이랑 믹서기에 간다. 단호박 삶은 물을 조금 넣으면 더 잘 갈린다. 곱게 간 내용물을 냄비로 다시 옮겨와 두유를 넣고 10분 정도 더 끓인 후 올리브유, 파슬리를 뿌려 먹는다. 미니 단호박 하나랑 당근 하나로만 만들어도 3인분은 나오는 것 같다.


속이  좋을 , 입맛이 없을 , 속이 허한  마음이 허한  모르겠을 , 지칠  수프가 당긴다. 수프를 만드는 것은 은근히 시간도 걸리고 설거지도 적지 않게 나온다.  저어줘야 냄비에 눌어붙지도 않고 가스레인지에 수프가 많이 튀지도 않는다. 주로 아침에 먹는데,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만들 결심이 선다. 그렇게 만든 수프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단순하지만 깊은 맛을 낸다. 속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맛이다. 먹다보면 보살핌을 받는 기분마저 든다. 그런 음식을 내가 나를 위해 만들  있는 것이 나는  좋다. 내가 나를 위로하다 보면 나는 나를  믿게 되는  같다. 내가 만든 수프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나의 무기다. 스스로를 믿게 하는 힘이 생기는 무기. 따뜻하고 부드럽고 맛있는 무기.

작가의 이전글 다른 위치에서 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