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연 돋보이는 것은 카메라다. 원 테이크로 찍은 듯 롱 테이크를 기술적으로 이어붙인 원 컨티뉴어스 숏은 110분의 러닝타임을 빈틈없이 채운다. 개미굴처럼 좁게 난 참호를 지나 철조망을 넘고 갱도를 건너며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는 스코필드의 여정에서 우리는 한 순간 그의 여정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 또한 멈추지 않고 그를 따라갈 것임을 알게 된다. (나의 경우 그것을 느낀 것은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에린무어 장군의 명령을 받고 다시 막사를 나온 후에도 숏이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부터 영화엔 두 줄기의 서스펜스가 교차한다. 과연 두 병사는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그리고 카메라는 이들의 임무 과정을 중지 없이 따라가는 영화의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서사 내부에 주어지는 임무와 서사 밖 형식에 주어지는 임무는 서로를 동력 삼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화를 이끈다. 다른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1917>만의 매혹을 나는 이곳에서 찾는다. <1917>이 시도하는 진정한 영화 실험은 원 컨티뉴어스 숏이란 촬영기법 자체보다, 그 기법이 영화의 서사에 미치는 영향과 그 서사가 다시 촬영기법에 미치는 영향 사이의 역학관계를 탐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1917>은 영화가 오랫동안 제기해온 하나의 질문, 이야기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실험적인 촬영형식과 비교할 때 영화의 서사는 단순한 편이다. 임무를 부여받은 병사가 한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명령을 전달하는 이야기.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8시간 안에 데번셔 2대대에 도착해 매켄지 대령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 이제 두 병사는 좋든 싫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대대를 떠나야 하고 데번셔 대대까지 가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장애물들을 넘어야 한다. “캐릭터의 모든 발자국을 함께 숨 쉬며 따라가고 싶었다”는 샘 멘데스 감독의 목표를 구현하는데 적합한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마치 옆에서 걷는 듯 캐릭터와 함께 숨쉬기 위해서는 관객이 숨죽이고 집중할 수 있는 스펙터클한 장면이 필요하고, 그런 장면을 유도하는 비현실적 장애물은 전쟁이라는 배경 안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캐릭터를 따라가는 원 컨티뉴어스 숏을 위한 서사적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시각적 완성도에서 나오는 영화의 강한 흡입력이 서사보다 원 컨티뉴어스 숏이란 카메라 형식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선 영화의 특정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롱 테이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롱 테이크를 위해 전쟁이라는 서사 배경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심의 전제엔 꽤나 본질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왜 롱테이크란 형식을 위해 전쟁이라는 서사 배경을 선택한 것을 영화 제작 순서의 앞 뒤가 바뀐 처사로 ‘의심’하게 되는가. 영화에서 형식은 언제나 서사와 의미를 위해 복무해야 하나.
여기서 영화를 서사와 형식으로 나눠 경중을 비교하는 쓸데없이 비장한 거시적 논쟁을 하고 싶진 않다. 영화가 나타나기 이전의 매체들에서도 형식주의나 표현주의와 같은 형식에 초점을 둔 작품들은 계속해서 생산됐고, 작품에서 서사와 형식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1917>은 영화의 형식과 서사간의 관계성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원 컨티뉴어스 숏이란 형식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1917>은 형식이 서사를 결정하고 다시 서사가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두 힘 사이의 역학관계를 영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으로 활용한다. 비유하자면 이 영화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는 전쟁영화의 틀 안에서, 이제껏 공고히 자리를 지킨 영화 속 서사의 지위와 현대의 촬영기술을 등에 업은 형식의 지위 사이의 대치 구도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단순한 서사 구성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보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험난한 장애물을 헤쳐가는 서사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그려지는 모험 서사는 <1917>이 그리는 한 병사의 모험 서사 안에 그대로 포개질 수 있다. 포세이돈의 폭풍우나 세이렌이 유혹들을 모두 이겨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서사 구조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스코필드의 여정과 닮아있다. 나무에서 시작해 나무에서 끝나는 수미상관적 구조, 독일군 진영에서 만난 프랑스 여인이 스코필드에게 떠나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 폭포에 떨어진 스코필드가 판자를 잡고 육지에 올라오는 장면, 숲 속에서 한 병사가 <방황하는 나그네>를 아득하게 부르는 장면은 약간의 비약을 가미하자면, 오디세우스의 고난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여기서 <오딧세이아>와 <1917>을 병치시킨 이유가 있다. <1917>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온 익숙하고 전통적인 모험 서사를 차용해 자칫 과해 보일 수 있는 영화의 실험적 형식과 서사상 제공되는 정보 간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꼭 <오딧세이아>가 아니라도 여호수아가 유대인을 이끌고 장애물을 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출애굽기>의 전통적 여정 서사를 대입해도 큰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서사 흐름의 익숙함이다. 이미 그 효과가 입증된 전통적 모험 서사는 자칫 피로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식적 파격의 완충장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장애물을 넘는 스코필드의 여정만큼 그를 쉼 없이 따라가야 하는 카메라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임무를 끝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블레이크의 형이 대번셔 2대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설정을 투입하고, 스코필드의 목숨을 구해준 블레이크가 죽음을 맞이하며 형을 대신 찾아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전하는 설정을 구구절절 배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서사의 개연성에 도움이 될 뿐 롱 테이크를 위한 기술적 개연성(가능성)엔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편집점을 만들어 줄 서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참호에서 철조망으로, 철조망에서 갱도로, 스코필드는 계속해서 a 공간에서 b 공간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때 그 과정엔 언제나 감정을 자극하는 조연들이 자리해있다. 그것이 긴장감을 유발하는 갱도 안의 쥐나 전쟁의 비애를 강조하는 물 위에 뜬 시체처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스코필드는 공간의 경계에서 감정을 동요시키는 대상을 만나게 되어있다. 참호에서 철조망으로 나아갈 때 만난 요크셔 연대의 지휘관 레슬리 중위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독일군 최전선에 가기도 전에 총에 맞을 것이라고 말하고 블레이크를 잃고 슬퍼하는 스코필드 앞엔 스미스 대위가 나타나 에쿠스트까지 태워줄테니 그만 일어나 따라오라고 명령하며 독일군 진영에 있던 집에 숨어 있다가 빠져나갈 때 같이 있던 프랑스 여인은 가지 말 것을 당부한다. 폭포에서 빠져나와 숲으로 향할 땐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서사를 중심에 두고 그 안에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익숙한 관객들은 서사가 유도하는 감정에 이끌리며 스코필드의 여정을 방해하는 인물들을 따가운 눈초리로 흘겨보고 감정을 자극하는 조연들에 신경을 집중한다. 이때 카메라는 한쪽에서 편집점을 찾아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인가.
나는 여기서 강력한 권위를 갖고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인용해야 할 것 같다. 플라톤이 <오딧세이아>를 쓴 호메로스를 그의 저서 <국가>에서 “감정의 유희를 즐기는” “사기꾼”으로 거세게 비난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언어라는 물감으로” 인간의 감정을 동요시켜 사람들의 분별력을 해치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못된 유희다. <1917>은 플라톤의 격언을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정, 사랑, 희생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의 원형들이 <1917>의 서사엔 예외 없이 삽입되어 있다. 영화는 그렇게 효과가 입증된 전통적 서사를 통해 유발한 감정의 동요로 화면 뒤에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들의 뇌리에서 잠시간 지워내는 것이다.
실제로 스코필드의 여정에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마다 카메라는 스코필드에게서 벗어나 편집점을 찾아내거나 카메라를 크레인에서 다른 크레인으로 옮길 시간을 번다. 스코필드의 시선을 따라가는 롱 테이크에 익숙해진 관객은 스코필드의 감정선에 어느새 밀착해 있고 위기의 순간이나 공간을 이동할 때 발생하는 서스펜스의 순간마다 관객은 롱 테이크란 영화의 형식보다 내레티브의 흐름에 신경을 더욱 집중하게 된다. 마치 긴장감을 유발하는 마술쇼에 등장하는 미녀처럼 한쪽에 집중된 시선이 분산된다. 마크 스트롱, 앤드류 스콧,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내러티브 곳곳에 눈에 띄는 배우들을 배치시키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신경을 자극하는 내러티브의 효과를 적절히 활용해 원 컨티뉴어스 숏이란 영화의 형식을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는 스코필드처럼 <1917>을 구성하는 서사와 형식의 관계를 살펴보는 시도가 다소간 직진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가 내세우는 형식적 고집이 서사와 형식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비평적 욕망을 자극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롱 테이크를 고집하는 이 영화가 서사적 효과를 이용하면서 공간과 공간을 하나의 시간 안에 억척스럽게 이어갈수록 영화는 이것이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일 뿐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추락하던 비행기가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에게 곧장 날아오는 장면이나 물 위에 떠가는 스코필드 위로 체리 꽃잎이 떨어지는 극적인 장면들이 그렇다. 이것은 허무주의나 휴머니즘같이 하나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여타 전쟁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자기인식적 메타영화의 특징이다. 전쟁이란 역사보다 그 역사를 해석하고 집필하는 인간에 주목하는 듯한 로저 디킨스의 멈추지 않는 카메라는 <1917>을 전쟁영화보다 전쟁영화에 대한 영화로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 점에서 많은 평자들이 이 영화에서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교하게 가공된 가상공간 위에 정보들을 빽빽하게 채워 넣어 유저의 생생한 체험과 몰입감을 유도하는 비디오 게임은 여러 구도에서 스코필드를 포착하는 <1917>의 화면구성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정교하고 빽빽한 화면구성을 향한 멈추지 않는 카메라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틈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한 공간에서 다른 무수한 공간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서사 뒤의 작가 또는 프로그래머의 그림자다. 스코필드를 a 공간에서 b 공간으로 매끄럽게 잇는 카메라 기술은 카메라가 a 공간에서 b 공간이 아닌 c,d 또는 무수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것은 유저가 정교하게 디자인된 비디오 게임을 현실의 재현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단계별로 구성된 게임의 스토리가 프로그래머가 구성한 가상공간임을 인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1917>이 내보이는 카메라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한편으론 다른 전쟁영화에서 강조되는 휴머니즘의 가치보다 전쟁 또한 하나의 비디오 게임 혹은 이야기짓기처럼 허구적 의미 위에 우연적으로 쓰여진 공허의 역사라는 해석이 전쟁의 진실을 더 많이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매켄지 대령이 전쟁의 공허와 비극에 대해 한마디로 설명하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은 단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것이다.” <1917>은 영화를 끝내는 길을 카메라가 멈추는 단 하나의 길로 설정해두고 맹목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발견해낸 영화 속 서사와 형식의 역학관계는 공허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휴머니즘적 의미를 발견하는 우리의 노력처럼 전쟁영화 속에서 영화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비평적 노력이기도 하다.
(실제로 데번셔 2대대는 1년 뒤 내려진 공격명령에 1918년 5월 엔강 전투에서 전원 희생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스코필드가 기댄 나무 앞에서 카메라의 중지와 함께 끝났고 그 이후의 서사는 또 다른 영화를 통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