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독서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거야.’
<채식주의자>와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저자의 폭력에 대한 민감성과 섬세한 작별의식에 대한 동기와 근원을 거꾸로 파헤쳐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집단과 개인의 폭력, 그 폭력 이후의 살아있는 존재들의 고통과 죄스러운 삶, 육체는 소멸되었지만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혼들과의 연대감,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가슴 아리도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문장들로 전하고 있었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본능 그 두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한 인간이 정의롭다 하더라도 군중 안에서는 어떠한 모습일지, 한 인간이 잔인하다 하더라도 또 다른 군중 안에서는 어떠한 모습일지.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군중 안에서도 홀로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며 침묵하는 군인이 있었고, 내 나라와 가족을 위해 총을 든 열댓살의 아이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인간’ 이었다.
내가 당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치가 떨리고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잔인한 폭력이 지나갔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매일 싸우게 될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척 소중하다. 지금은 영혼이 되어버린 죽은 자들에게도, 폭력 이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산 자들에게도.
기억은 그 시공간에 담겨있던 모든 이들과 사건의 동기,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 그 처절함과 승리를 전하고 회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것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유를 위해서, 용서를 위해서, 그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기억하고 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도 저자는 기억의 끈을 잇고 싶었던 듯 하다.
p. 18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려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p. 45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p. 52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p. 55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p. 77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자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p. 102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p. 114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 116
총을 메고 창 아래 웅크려앉아 배가 고프다고 말하던 아이들, 소회의실에 남은 카스텔라와 환타를 얼른 가져와 먹어도 되느냐고 묻던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서 뭘 알고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p. 117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p. 130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거야.
p. 135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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