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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kii Feb 15. 2021

그동안 뭘 했는가

방송작가 생활 n년 차.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백수 생활에 대해 연재하겠다며 당차게 브런치 작가 세계에 발을 들인 나. 두어 편의 글을 올린 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다?! 그 이유는...


별 일은 아니고 그냥 백수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써야 나에게 좋다는 점쟁이의 말이 맞아 들었는지, 연재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새로운 팀에서 일할 기회가 왔다. 웹 송출용 아이돌 콘텐츠 제작이었는데,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면 환장하는 나의 흥미를 자극했고 좋아하는 사람과 일할 때'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나의 저주받은 적성에 딱 맞는 프로그램이었다.


돈은 적었지만... 출연진들이 굉장히 좋았고(특히 외모가) 좋은 선후배 작가님들과 좋은 팀원들을 만난 덕에 예정된 회차 동안 짧고 굵게, 재밌게 일했다. 매 회차마다 1박 2일간 펜션에서 촬영을 했기에 대학 시절 MT의 추억도 떠오르며 참 좋았다. (실상은 대학생들의 MT를 구경하며 쉴 새 없이 일하는 펜션 주인아저씨의 롤에 더 가까웠지만.)


그 후로 또다시 백수가 되나 싶던 찰나, 작년에 함께 동고동락했던 작가팀이 다시 뭉칠 기회가 생겼다.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 하겠노라며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메인작가님이 너무x500 좋으시기 때문. 나는 이 프로그램에 함께 하기 위해 원래 함께 하기로 했던 팀에 안녕을 표했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기획의 나날들이 펼쳐진다.


사실 어떤 방송 프로그램이든, 기획 기간은 힘들다.(그리고 기획 기간에는 페이도 적다) 프로그램의 기반을 다지고 틀을 세우고, 수평이 맞는지 앞에서 봤다가 옆에서 봤다가 위에서 봤다가, 나중에는 우주선을 타고 인공위성 부근에서 '이게 맞나'하며 지켜보는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살을 붙인다는 것은 당장 엄두도 못 낼 만큼 그 후의 일이며, 매일매일 어제 했던 회의 내용을 다시 꺼내다가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는 과정이 아침부터 새벽까지 반복된다. 거기에 음악이라는 옵션이 더해지니 일이 몇 배는 더 늘었음은 물론이요 그냥 아주 죽을 맛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퇴근하고 싶다'를 습관처럼 되뇌었으며 사무실에 들어서면 다들 하나같이 눈 밑이 퀭한 채 힘없이 서로를 반겼다. 이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오직 작가팀의 동지애뿐... 서로 등을 두드리며, 때로는 멱살을 잡고 질질 끌며... 그냥 이를 깍 깨물고 참았던 거야...


(스위트 홈은 안 봤지만) 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좀비처럼 일하다 보니 어느새 첫 방송 날이 왔고 눈감았다 뜨니 마지막 방송이 끝났다. 브런치가 뭐야... 그냥 일상을 잊은 채 6개월이 뚝딱 흐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백수 시즌이 왔다. 첫 일주일은 집에서 누워서 잠만 자며 시간을 보냈고, 그다음 일주일은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나니 또 무료함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시기. 그러면 또 최선을 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줘야지. 의미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몸이 편해지자 슬슬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줄어드는 통장잔고, 다음 달 카드 값과 월세, 그리고 나만 빼고 다시 바빠지는 친구들. 하지만 여전히 아직 일은 하기 싫다.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몸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머리만 팽팽 굴린다. 일을 하지 않을 방법... 1. 로또를 사자 2. 연금복권을 사자 3. 우리 집 고양이가 귀여우니 유튜브 채널을 만들자. 하지만 이건 엄밀히 따지자면 일이다. 삭제


도무지 답이 없으니 이제 과거의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왜 열심히 저금을 하지 않았나'... '그동안 일하면서 번 돈은 다 어디로 갔나'. 'n년간 소처럼 일하고 남은 대가가 고작 1TB도 채우지 못한 외장하드 하나와 통장 속의 x00만원이라니. 삶은 역시 부질없어'... '이젠 뭘 하지...' 그리고...!


...! 잊고 살던 브런치가 떠오른다.


나에게 브런치란, '오로지 백수 시즌에만 할 수 있는' 생산적인 활동 아니던가. 애초에 백수 생활에 대해 연재하겠다는 콘셉트를 잡았으므로 이 시즌에 바짝 써야 한다. 언제 다시 사무실 좀비가 될지 모르니까.


n년이라는 시간 동안 방송작가로 일하며 큰돈을 벌진 못했을 지라도, 나의 백수 시즌을 누군가 앞에서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라고 교훈적으로 글을 급 끝맺어본다. 내일부터는 정신 차리고 연재할만한 일상 에피소드를 짜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직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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