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결정을 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보기를 찾기란 어렵다. 그래서 보기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하지만 결정을 하고 나면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 이유가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후회하지 않는 이유가 ‘괜찮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후 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합리화를 잘하는 편이니까. 한 친구는 나에게 이런 칭호를 부여해주었다. “너는 ‘합리화 대마왕’이야.”
나는 결정할 때 꽤 고민하는 타입이므로 타인의 고민에도 크게 도움 되지 못한다. A 어때? A 좋지. 크기도 알맞고 가격도 저렴하잖아. B는 어때? B는 내구성도 좋고 디자인도 괜찮지. 상대방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야, 그래서 A라는 거야, B라는 거야?
하지만 이미 결정을 한 경우엔 상황이 달라진다. 나는 결정된 사항에 대해 적극적인 후원자이자 지지자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적이 망해서 재수강을 결심한 친구에게 그것이 얼마나 잘한 선택인지 옆에서 바람을 넣어보자.
“너 이번 학기에 과제랑 시험 많았잖아. 그 과목까지 성적 챙기려고 했으면 다른 과목은 완전 망했을 걸? 재수강하면 한 번 들은 거니까 예습한 거로 생각해. 과제도 해둔 거 있겠다, 그 교수님 시험 스타일도 알았겠다, 훨씬 편하겠지. 그 분야 지식을 좀 더 탄탄히 다진다고 생각해. 그게 진정한 공부지.”
그렇게 합리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처음부터 성적 잘 받은 학생들은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를 놓친 거야(?)’라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의할 사항은 결정에 대한 단점은 깡그리 잊어야 한다. ‘그 수업을 다시 듣는다고 생각하면 힘들겠다, 게다가 등록금이 얼만데.’ 이런 말은 절대 떠올려서도, 내뱉어서도 안 된다. 마음만 아프니까….
합리화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친한 회사 동료가 휴대전화를 바꿨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으로. 휴대전화를 내밀어 보이는 동료의 얼굴이 밝았다. 기존 휴대전화 약정기간 남아있는 거 아니었냐 물으니 밝던 표정이 어두워진다. ‘실은 친구 따라 구경 갔다가 홧김에 바꿨어. 그러다 보니 가격 할인도 못 받고 다른 사람들보다 비싸게 주고 샀더라.’
“근데 그 휴대폰,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쁜데? 생각보다 가볍고.”
“그치? 원래 어두운 색 사려고 했는데 이 색이 제일 이쁘더라고.”
“그 색 인기 많아서 재고 별로 없던데. 그 매장엔 있었나 보네.”
그렇게 합리화가 시작된다. '마음에 드는 색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교통비가 얼마니, 인터넷에서 최저가 찾으려고 검색하다 보면 보내는 시간은 얼마고. 게다가 싸게 샀다고 생각했는데 뽑기 운 나쁘면 골치 아프다? 케이스랑 쿠폰도 받았다고? 안 챙겨 주는 경우도 많아. 그리고 원래 사고 싶은 물건은 빨리 사서 열심히, 오래 쓰는 게 뽕 뽑는 거야….'
회사 동료의 표정이 밝아졌다. 주변에서 잘못 샀다고 하도 뭐라 그래서 속상했는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단다. 본인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그래, 나 이 휴대폰 완전 열심히 쓸 거야!’ 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럴 때 굉장히 뿌듯하다.
엄마는 이런 날 보고 말한다. “그게 어째서 합리화야. 넌 궤변론자야.” 뜨끔. 하지만 애써 부인한다. 좀 우격다짐이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이 궤변(?)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안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도 종종 나의 합리화를 찾는다는 걸.
사실 나의 합리화를 듣고 맞장구쳐 주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 합리화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부실한 지를. 처음부터 내가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았으니까. 그냥 당신의 선택이 괜찮다고 해 준 것뿐이다. 사람들은 그 응원이 좋았던 거다.
이제까지 나의 합리화는 타인 한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미 내 삶에서 조용히 적용했던 듯하다. 나에게 선택이란 어렵고 두렵다. 하지만 완벽한 선택이란 없다. 선택이 옳았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 선택은 (본인의) 정답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오늘도 정답이 될 보기를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