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차 상경러의 서울살이
서울에 상경한 지 어느덧 5년 차. 휴대폰을 꼭 쥐고서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이젠 어떤 역에서든 여유롭게 환승을 할 수 있고, 버스에서 내릴 땐 환승을 하지 않더라도 하차 태그를 꼭 찍어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한마디에도 "경상도에서 오셨어요?" 라는 동문서답을 받는 게 익숙했던 몇 년 전과는 달리, 이젠 제법 능글맞게 "제 고향 맞춰보세요"라며 자연스러운 서울말로 너스레를 떨 수 있고 언젠가부턴 "잠 온다"라는 표현 대신 "졸리다"라는 표현이 더 입에 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나에게 '서울'이라는 곳의 의미는 강렬하다. 여전히 '신촌'이나 '혜화' 등의 지하철역을 지날 때면, 어려서 TV로만 보던 혹은 노래 가사에서만 듣던 그곳에 직접 와 있는 기분이니까 말이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서울에 와서는, (누가 봐도 관광객처럼 호들갑을 떨며)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님과 단체 사진을 남겼었는데. 그땐 그렇게 큰맘 먹고 계획을 짜서 놀러 오던 곳이 언젠가부턴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면 몇 번씩이고 마주치는 생활 반경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묘한 기분을 자아내곤 한다.
상경을 하고 자취 라이프가 시작되면, 매일매일이 방탕한 파티의 연속일 것만 같던 상상과는 달리 '혼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쉽지 않았다. <응답하라 1994>나 <청춘시대> 따위를 보며 서울살이를 꿈꿔 왔기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들어갔던 셰어하우스는 그저 무서운 언니들이 있는 장기 투숙형 게스트하우스에 불과했으며 뒷손이 야무지지 못한 나는 종종, 단체 카톡방에서 설거지를 제때 안 한다고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셰어하우스를 뒤로 하고 상경 1년 만에 첫 자취방을 구했다. 방의 크기보다는 깔끔한 인테리어가 더 중요했던 나는 우리나라 최소 주거면적 기준에 겨우 부합하는 4평 남짓의 신축 오피스텔에서 첫 살림을 시작했다. 나는 화장실 변기나 세면대에 붉은색의 물 때가 그렇게나 빨리 생기는 줄 처음 알았으며, 배수구의 머리카락을 자주 치워주지 않으면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도, 설거지를 심하게 쌓아두면 그릇 사이사이에 곰팡이가 필 수 있다는 것도, 여름에 쓰레기통을 제때 안 비우면 초파리가 알을 깔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육성으로 꺄악-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엄마는 차분하게 "거 쪼매 있으면 니 집이 아니라 갸들(초파리) 집 되긌다." 라고 한숨을 내쉬시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청소를 해주려 서울에 올라오셨다.
좁은 자취방에 혼자 누워있다보면, 만약 갑자기 이 상태로 내가 의식을 잃는다면 그 누가 나의 생사를 알아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꽤나 방목형으로 컸던 나는 지금도 부모님과 연락을 그리 매일같이 주고받지는 않고 친구들의 카톡 메시지도 잘 읽지 않기에, 연락이 며칠 안 된다 하더라도 아마 그저 바쁘겠거니 하고 넘길 가능성이 크다. 아무래도 이미 골든타임을 한참 넘긴 뒤에야 누군지 모를 아무개의 신고로 발견되겠지. 혼자 살던 독거노인이 화장실 안에서 문이 잠겨버려 2주 동안 화장실 수돗물만 먹고 버티다가 가까스로 구조되었다는 기사가 크게 남 일 같지가 않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이후론 남자친구를 사귈 때 가장 먼저 따지는 조건이 '가까운 동네에 사는지'가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딸내미를 조금이라도 늦게 독립시키고픈 마음에, 고3 입시철 조심스럽게 경북대나 대구교대 따위로의 진학을 제안하시기도 했지만 강경한 나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렇게나 서울에 오고 싶어서,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떵떵거리며 올라왔건만, 여전히 본가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날이면 동대구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괜히 울컥해 눈물을 훔치곤 한다.
요즘은 마스크를 끼니 참 다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