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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짱이 Apr 02. 2022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

19년도의 그 여름밤 이야기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아직까지도 잔나비 노래의 첫 멜로디를 듣는 그 순간이면 어느새 19년 초여름의 캠퍼스, 노천극장으로 돌아가 있는 듯하다. 극장에 꽉꽉 들어찬 사람들, 무대 위의 신난 잔나비, 뜨거운 함성과 앵콜을 외치는 소리 ... 그리고 그 무대 뒤를 지키던, 남색 STAFF 옷을 맞춰 입은 우리. 짬밥이 부족한 일개 부원이었던 나는 무대 뒤 주차장을 관리하느라 잔나비 얼굴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지만, 그 멜로디를 귀에 가득 담는 자체만으로도 괜스레 가슴 벅찬 기분이 들었다.




대학 총학생회가 뭐하는 곳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고등학교 시절 나름 전교 부회장으로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패기롭게 들어간 곳이었다. 국문학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고리타분한 과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았던 나의 결정이기도 했다. 뭐랄까, 다른 과 친구들도 사귀고,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놀아보자 같은 거랄까. (그럴거면 차라리 복전이라도 해두지. 공부를 싫어하는 난 복수전공 같은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새내기 시절 1년 간은 제대로 꿈 꿔보지 못했던 '진정한 대학생활'의 모든 로망은 그 곳에서 실현되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총학생회 부원들은 말그대로 매일매일 술파티를 벌였고 아침이 되어 학교 앞 술집이 셔터를 내릴 때까지 죽치고 있는 일이 다반사, 여차하면 총학생회실에 기어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다가 끔찍한 몰골로 1교시 수업을 들어가곤 했다. 난 애초에 알코올 분해 능력이 떨어져 술을 잘 못하는데, 그냥 그 자리가 너무 재밌어서 맥주 한 잔으로 '짠'을 8번씩 해가며 정신력으로 버텼던 것 같다. 새벽 4시쯤이 되면, 내 앞 자리에 앉은 (이미 취한) 친구들은 날 보며 "너 술 진짜 세구나, 왜 안 취하냐?"라며 억울하단 듯이 웅얼댔다. 바본가? 안 마셨으니까 안 취하지. 물론 이런 앙큼한 속임수가 오래가진 못했고, 첫 MT를 간 날 술게임에 걸려 소주를 몇 잔 받아 마시다가 순식간에 졸도해버려서 '장희진 술 진짜 세다'라는 소문은 깔끔하게 일단락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체력도 대단했지. 아침부터 학교에서 수업을 다 듣고, 곧바로 빕스 알바를 가 마감까지 마친 뒤 돌아오는 시간은 약 밤 11시. 그 때쯤이면 항상 단톡방에 오늘은 'OO포차'로 오라는 구인글(?)이 올라왔고 내일 일정을 생각하며 갈까 말까 고민도 잠시, 나의 답장은 언제나 '곧 감!'이었다. 그렇게 또 밤새 별별 이야기 꽃을 피우다 해가 뜨면 그제야 집에 들어가 샤워만 하고 곧바로 다시 등교하곤 했다. 이런 일정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겠지만 사실 위의 '아침부터 학교에서 수업을 다 듣고'라는 문장에서, '다'는 빠져야만 하는 글자일 거다.


물론 총학생회에서 이렇게 술만 퍼마시는 일만 하진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연례행사는 '대학 축제'일 것. 2019년은 '잔나비'가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곡으로 어마어마한 라이징 스타가 된 해였고, 마침 잔나비의 보컬 최정훈이 우리 학교 경영학과 출신 선배였다는 사실이 공공연해졌다. 학교 커뮤니티에서는 그 해 축제에 잔나비를 섭외해달라는 문의가 쇄도했었는데 나는 일개 부원이었기에 그 과정은 잘 몰랐으나, 여차저차 섭외에 성공했던 것인지 잔나비가 축제 라인업에 들어가게 되었던 거다. 역대급 규모의 축제 준비로 우리는 매일같이 총학생회실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회의를 하기도, 수다를 떨기도, 종종 의견 차이로 말다툼도 하고, 그러다 야식을 시켜먹고 맥주를 마셨다. STAFF 옷을 입고 무전을 차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방울을 흘리던 그 해 초여름 축제날. 꽉 찬 관중들과 귀에 가득 울리는 잔나비의 그 생생한 라이브, 그 여름의 밤 공기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테지.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우린 가을에 또 한 번의 축제를 열었고, 대여섯 번의 MT를 함께 갔고, 수십 번의 술자리를 함께 하며 밤을 새웠고 학교 앞 술집 사장님들과 안면을 텄다. 공강 시간이 생겨 갈 곳이 없을 때마다 우린 하나같이 그 총학생회실에 모여 교수님 뒷담을 하고, 연애 상담을 하고, 시덥잖은 개그들로도 깔깔거리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새로운 사랑도 우정도 생겼지만 그 때의 우린 아주 어렸고, 크고 작은 갈등과 오해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었지. 그렇게 1년의 임기가 흐지부지 끝났고 다음 총학생회 연임에는 실패했으며, 설상가상 코로나가 터져 우리뿐 아니라 모든 대학 사회가 멈춰버렸다. 자연스럽게 우린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다 같이 모여 회식을 하던 때는 점점 더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집에서 홀로 정신없이 수업을 듣고 학점만 채우다 보니 난 어느순간 졸업을 앞둔 취준생이 되어 있었으니- 사실상 나의 '진정한' 대학 생활은 21살을 끝으로,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 달 전쯤, 학생회를 같이 했던 선배의 가족상으로 장례식에 갈 일이 있었다.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학생회 동기와 함께 지방까지 내려갔다 왔는데,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참 반갑기도 한 마음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어색하게 건네는 안부 인사들이 괜스레 씁쓸했다. 누구는 '나 어디 다니고 있어'라며 말문을 텄고, 또 누구는 '그냥 공부하고 있어'라며 말끝을 흐렸다. "희진이가 벌써 4학년이구나. 어디어디서 인턴 한 것 같던데 진짜야? 열심히 살았나보네." 인스타그램 스토리로만 드문드문 접하던 소식들이 그저 진짠지 확인하는 자리. 요즘 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곧 그 동안의 나의 인생을 증명할 수단이 되었다. 코로나가 2년이란 시간을 통째로 멈춘 사이에,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종종 수업을 빼먹기도 하며, 서로 시덥잖은 장난을 치며 걱정없이 놀던 그 때의 철없던 대학생들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고, "다음엔 누구 하나 결혼해야 만나려나"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학생과 사회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처음 체감하던 그 날. 밤 늦게 돌아오던 고속버스에서 오랜만에 잔나비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글쎄, 아마 볼품없진 않았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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