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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짱이 Apr 02. 2022

32살 꼰대의 편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나에게 ‘상경’과 ‘아르바이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멋있는 영화관이나 레스토랑에서 또래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일을 해보는 것은 하나의 로망이기도 했거니와, 노는 걸 좋아하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나는 차마 부모님께 용돈을 올려달라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학비와 서울에서의 월세, 기본적인 생활비만 해도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활동적인 성향인 나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건 어쩌면 재미난 또 하나의 사건이었기에 나름대로 즐기면서 꾸준히- 참 다양한 곳들에서 일을 해왔었다. ‘공부는 5시간 한다고 별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알바를 5시간 하면 공부하는 것보다 재미도 있을 뿐더러 그만큼의 돈까지 꼬박꼬박 주니 얼마나 금상첨화인가?’ → 이런 마인드였다.


20살, 가장 처음 하게 되었던 아르바이트는 ‘세븐스프링스’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홀서빙.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경력 하나 없는 채 막무가내로 면접을 보러 갔었던 곳이었다. 어찌어찌 패기로운 모습들을 내비치며 면접을 다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있냐는 매니저님의 말에 “그 ... 혹시 사투리 써도 상관없나요?”라는 어이없는 질문을 매우 조심스럽게 했었더랜다. 빵 터진 매니저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며 첫 출근 날짜를 알려주셨고, 회기에서 여의도까지 출퇴근을 하면서도 서울 구경 신난답시고 발발거리며 일을 다녔던 것 같다. 학교 끝난 뒤 알바를 하러 여의도로 넘어가면,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멘 수많은 직장인들이 맞은 편에서 쏟아져 나왔었는데 5년 뒤 쯤에는 꼭 저런 직장인이 되어 여의도에 다시 올 수 있겠지- 생각하며 혼자 히죽 웃곤 했다. 

  



처음 마주하는 나의 어리바리한 모습에 이제야 좀 적응이 되어갈 때 즈음, 여의도점은 내가 알바를 시작한 지 3개월만에 폐점을 하게 되었고, 반 강제적으로 퇴사를 했다. 약간의 휴식기를 가진 뒤 나는 청담동에 있는 빕스로 다시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레스토랑 알바 경력은 레스토랑 알바 면접에 가장 잘 먹혔기 때문이다. 여의도보다 출퇴근도 용이했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너무 좋았기에, 난 빕스에서 최장 알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래봤자 8달이긴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알바하러 가는게 너무 재미있어서 일주일에 4번, 많으면 5번씩까지도 출근을 했었다. 원래 정해진 근무일은 3일이었지만, 단톡방에 누가 대타라도 구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해주겠다고 나서는 식이었다. 학교 끝나고 곧바로 출근해 밤 11시가 되도록 마감까지 쳐야하는 빡센 마감조였지만, 손님들이 다 나가고 매장 문을 닫은 뒤 또래 친구들과 남은 음식들을 맘대로 집어 먹던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우리랑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던 젊은 매니저님은 항상 집에라도 싸가라며 비닐봉지를 손에 쥐어주셨고 자취생이었던 나는 뭘 담아갈지 고민하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백’이라고 불렀던 뒷 주방에서는 짬을 누가 버리러 갈지 결정하는 가위바위보 소리가 연신 들렸지만 어차피 한 명이 걸려도, 마지못하는 척 같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실 의미가 없는 게임이었던 거다. 여느 곳이나 그랬겠지만 20대 초중반의 또래들이 모이다 보니 곳곳에 사랑이 꽃피기도 했는데, 거기서 만나 몇 년째 연애를 이어오던 언니 오빠의 몰래 주고받던 눈빛들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였다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던 걸까, 같이 일하던 오빠들이 날 막내라 부르며 시덥잖은 장난을 치다가 귀엽다며 머리라도 한 대 꽁 쥐어 박으면 괜스레 얼굴이 화끈해지기도 했는데, 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상여우들이 아닐 수 없다.


뭐, 이렇게 청춘 드라마같던 기억들도 많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시 상종하기도 싫은 진상들을 가장 많이 만난 곳이기도 하다.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완전 멘붕에 빠뜨렸던 한 커플이 있었다. 레어-미디움레어-미디움-미디움웰던-웰던, 총 5가지의 스테이크 굽기 중에서 ‘미디움’으로 구워달라 요청했던 바로 그 커플. 주방 셰프님께 미디움으로 주문을 넣고, 미디움 굽기로 그대로 갖다 드렸는데 다짜고짜 핏기가 보인다며 화를 내는 게 아니겠는가. 당황했지만 그런 일은 종종 있던 일이기에, 친절히 조금 더 구워드리겠다 말하고 얼른 다시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한 번 더 구워 다시 가져다 드렸음에도, 갑자기 칼을 탁! 내려 놓으며 앞에 나를 세워 놓고는 “아니, 이걸 지금 사람이 먹으라는 거야? 피가 줄줄 나오는데? 당신들은 고기를 이렇게 먹어?!”라며 고함을 치기 시작하던 남자. 머릿속이 새하얘진 나는 “고객님이 미디움으로 시키셨... 죄송합니다...”라며 툭 건들면 울 것 같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댈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다른 오빠가 자기가 처리하겠다며 패닉이 된 나를 내보내고는 ‘시키신 스테이크가 다른 스테이크보다 두께가 있는 편이라 조금 덜 구워진 느낌이 날 수도 있다, 게다가 미디움으로 시키셨으니 핏기가 보이는 건 당연하다, 원하시면 웰던까지 다시 핏기 없게 구워드리겠다’ 라고 강하게 말하자 그제서야 조용해진 남자였다. 생전 선생님이나 부모님한테도 그렇게 혼나본 적이 없던 나는 그 날 하루종일 넋이 나가 홀에서 연달아 실수를 했고 보다못한 매니저님은 나에게 진정 좀 하고 오라며 ‘백’으로 좌천시키셨다. 날 도와줬던 그 오빠는 괜찮냐고 물으며 그런 상황에서 기가 죽어 있으면 그 사람들은 더 신나서 괴롭힌다고, 눈 똑바로 보고 응수해주거나, 못하겠으면 바로 매니저님 불러오겠다고 말하고 빠지라고 조언해줬다.

    



아무래도 2018~2019년 즈음이 패밀리 레스토랑 계의 '타노스 손가락' 시즌이었나보다. 이러쿵저러쿵 즐겁게 일했던 빕스또한 2019년에 접어들며 폐점 소식이 솔솔 들리기 시작했고, 알바생이었던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갈 것이냐, 그냥 퇴사를 할 것이냐. 마침 레스토랑 일을 오래하다 보니 각종 습진이 생겨 손이 남아나질 않았었는데, 조금 아쉽지만 그렇게 레스토랑 계 알바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뭐, 물론 그 때 생긴 습진들은 아직도 완치가 되지않아 종종 날 괴롭히고 있지만 말이다.


일을 딱히 빠릿빠릿하게 잘 하진 못했던 나는 바보같은 실수도 많이 했고, 똑부러지는 에이스보다는 언니오빠들 즐겁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에 더 가까웠기에, 퇴사를 앞둔 어느 주말에 선물처럼 받았던 첫 ‘직원 칭찬 카드’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매니저님은 “희진이 칭찬 카드 들어왔네~”라며 무전을 치셨고 “와 정말요!”라며 후다닥 달려나가 카드를 읽었던 그 때. ‘희진(?)님 덕분에 기념일 즐겁게 보내다 가요. 감사합니다~’라는 한 커플의 짧은 메시지는 8개월 간의 노고를 모두 씻겨 내려주는 듯, 뭔진 모르겠지만 난생 처음 느껴보는 듯한 벅찬 기분이 들게 했더랜다.


빕스를 그만 둔 뒤로도 또 다른 종류의 알바들을 전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지만, 그중에서도 정말로 ‘멋’있는 어른이었던 빕스 매니저님이 폐점 전 단체방에 남긴 취중 메시지는 생각날 때마다 종종 꺼내보며 그 때를 추억하게끔 했다. 32살 꼰대의 말이라며, 쉽게 읽고 쉽게 잊으라던 그 활자들엔 코 묻은 돈 벌어보자고 투닥거리며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0대 초중반의 우리들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 나 있었다. 내일 모레면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 매니저님은 지금 잘 살고 계실지, 그저 20살 새내기였던 내가 어느새 졸업을 앞두고 회사에 다닌다 하면 얼마나 놀라실지, 시간이 흘러 언젠가 내가 32살이 되어 이 메시지를 다시 읽으면 어떤 기분일지 ...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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