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군위 사유원
울창한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도시의 바람과는 다른 모양이다. 바다에서 습하고 짠내 나는 시원한 바람의 모양처럼, 숲 속의 바람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를 가졌다. 눈앞에 보이는 온통 초록색 물결처럼 이 바람도 초록색일 것만 같았다. 바람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는 높이 솟은 나무들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춤을 추며 또 서로 부딪혀 풍류의 소리를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숲을 찾아 나선다. 하루하루를 목표에 집착해 살아가는 것에서 잠시나마 멀어지기 위해서. 세월을 견딘 수많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에 기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인간은 자신이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하며,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 도가의 대표적 사상가 장자는 진짜 여행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했다. 逍(거닐 소), 遙(멀 요), 遊(놀 유),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진 여행이 아니라 스스로 출발지와 목적지를 정하는 '주인'이라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인생해 대입하면 목표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삶을 뜻하기도 하다.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끈기와 열정이 곧 덕목인 현대사회의 삶과 정반대를 추구하는 장자의 삶의 형태를 닮은 곳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팔공산 지맥 70만㎡에 사람이 만든 자연의 정수가 펼쳐진 사유원은 TC태창을 이끌었던 사야 유재성이 평생 아꼈던 바위, 세월을 견딘 소사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세계적인 건축가, 조경가, 예술가들의 원초적 공간이 함께 자리 잡았다. 수목원이며 산지 정원이자 사색의 공간 풍류의 산수 사유원은 계곡과 능선을 따라 무념산책을 권한다. 절기의 바람을 품은 산세, 거친 콘크리트와 붉은 철판의 그림자, 사유원의 아름다움이 본래의 우리를 부른다.
대부분의 건축이 필요에 의해 생성되며 가장 주요한 바탕은 땅이다. 땅을 파헤치고, 그 위로 단단한 구조가 오르고, 사람이 지나가는 곳을 따라 모양이 제각각으로 변형된다. 수목이 가장 중요했던 사유원의 땅은 사람의 거주 방식이 구체화되기 전에 발상되어 거주의 요건이 적은 사유원은 햇빛과 바람에 몰입했고,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동식물들이 갔을 법한 길들과 주변 풍경과의 시선 축을 고려해 설계 방향으로 설정됐다. 최소한의 인프라로만 존재해야 했고 건축의 형태 역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경치가 전개되는 크기와 깊이가 있다면 건축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사유원의 얼굴이자 정문인 치허문은 도덕경 제16장, 치허극 수정독에서 나온 말로 극도의 비움에 이르러 지극한 평온을 두터이 지키다는 뜻의 치허극 수정독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 정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붉게 녹슨 코르텐강 박스만이 서 있고 '사유원' 강렬한 획의 세 글자 간판만이 입구를 지탱하고 있다.
각종 나무와 돌들이 세심하게 조성된 수목원은 사실 거대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건축가들의 다양한 생각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숲은 철저하게 건축적 요소를 통해 구성됐다. 건축설계방식을 이용해 관람객의 동선에 따른 시선의 이동을 분석하고 해석해 건축가에 의해 재구성되어 수목원의 자연환경에 자연스럽게 숨어들었다.
사유원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들의 명성은 놀랄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1992년 프리츠커상, 2002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는 이곳에 '소요헌', '소대', '내심낙원' 등 세 가지의 건축물을 설계했다. 단순한 외관의 건축물이 풍경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도록 하여 예상치 못한 건축적 경험을 선사해 '건축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의 건축 특징은 사유원의 지형에 맞춰 숲 속 곳곳에 점처럼 찍혀있다.
치허문을 지나 꼬부랑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 올라갔다. 먹구름이 털어내는 빗줄기와 수증기가 만들어낸 물안개는 숲을 더 신비롭게 산책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한다. 어슴푸레 고개를 보이는 탑은 가까이 다가서야 거대함이 드러난다. 기울어진 20.5m의 탑 '소대'는 알바로 시자의 요청으로 소요헌과 함께 구상한 전망대다. 새둥지 소대라고 부르기도 한 전망대는 어두운 조명 아래 계단을 오르며 사유원의 멀고 가까운 전망을 동서남북으로 모두 품어 조망할 수 있다.
기다란 상자의 모양 두 개를 Y자 모양으로 연결한 형태를 띤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에는 어떠한 기능과 장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자의 '소요유'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한 '소요현'은 원래 피카소의 임신한 여인과 게르니카를 전시할 스페인 마드리에 지어질 것으로 구상했던 '아트 파빌리온'이었다. 건물 내 두 갈래길 중 하나의 끝에 작은 틈새 사이로 내려오는 철제 구조물만이 유일한 이 건물의 조각품이다.
소요헌의 작은 입구를 지나 안에 들어오자마자 감탄의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기다란 상자처럼 쭈욱 뻗은 공간 내부는 가운데 뻥 뚫린 독특한 공간감과 천장의 작은 틈 사이로 내려오는 빛은 벽과 바닥과 마주하며 조각품을 비추어 다채로운 인상을 선사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알바로 시자의 조각품은 거칠고 날카로운 형태를 보인다. 한국 전쟁의 격전지였던 이곳의 폭력과 전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새겨진 공간으로 대신한다.
소요헌의 건축은 빛을 그리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건축에는 그 어떠한 기능과 장식이 존재하지 않고 차가운 콘크리트의 면적만이 공기를 감싼다. 하나 있다면 건물 중심부의 작은 정원과 나무 벤치가 전부다. 이마저 천장은 뚫려 있어 시선은 빛을 따라 하늘을 향한다.
소요헌의 또 다른 특징은 벽에 창문이 없는데 바라보는 벽면이 모두 액자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만 같다. 형태만으로 가로로 길게, 세로로 높게, 프레임도 유리도 없는 벽은 바람과 빛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가 지날 때마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숲을 물결처럼 건물도 자연과 하나가 된다. '우주와 하나 되어 평안하게 노닌다.'라는 소요유의 의미처럼 이곳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거닐며 사색을 즐기라는 뜻이었을까.
사유원의 가장 깊은 곳 중에 위치한 '내심낙원'은 김익진 선생과 벨기에 신부 찰스 매우스 두 분의 아름다운 교유를 기리기 위해 김익진 선생의 가톨릭 번역서 내심낙원(內心樂園)에서 건물의 이름을 따왔다. 건물 외 출입문을 비롯해 건물 내 십자가, 제단등도 모두 알바로 시자가 제작해 포르투갈에서 이곳으로 운송해 설치를 진행했다. 하얀 사각형 박스 위 삼각 지붕의 모양의 형태는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 의미는 굉장히 깊은 곳이다.
또 다른 건축가 승효상은 사유원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설계부터 건축물까지 공간을 더욱 깊게, 밀도 있게 개념을 정립했다. 능선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넓은 땅에 풍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건축이었다. 이 땅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사유원의 곳곳에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했다. 단순 건물을 짓는 게 아닌 어디서 봐야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지, 어디로 어떻게 가야 숲을 더 이해할 수 있는지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다.
그가 사유원에서 가장 먼저 설계한 건물은 소나무 숲 속 가운데에 위치한 '현암'이다. 그 뜻은 누추하고 검은 집으로 내부에 들어가면 하늘과 땅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쉽게도 내부의 모습은 티 하우스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하기에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현암의 지붕이자 전망대에서도 그 의미를 작게나마 느낄 수 있다. 그 위에 서면 장대하고 깊은 자연만을 마주하는 광경은 대자연 앞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숲 속 안 연못이 있는 자리에 절묘한 공간감이 느껴지는 건물 '사담'은 공연장과 식장, 카페를 포함하고 있다. 사유원의 건축물 중에서 뚜렷한 기능이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다. 공연장은 곧 무대를 위한 기능이 분명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유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오히려 공연을 관람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장애물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공연장 정면으로 코르텐 강으로 벽이 세워졌고, 지형의 경사를 활용해 언덕에서 끄집어낸 듯한 느낌 때문에 건물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풍경을 가리는 벽과 무대가 있고 관객은 연못 건너에서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그리고 한쪽의 미니멀한 계단은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장치이자 무대를 좀 더 입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끔 하는 기능도 부여했다.
수목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자꾸만 더 머물고 싶도록 옷가지를 붙잡는다. 세상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모과나무 풍경은 범접할 수 없는 장관을 선사하며, 몇 백 년 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가장 높은 정상에 올라가도 주변에 온통 푸른 산으로 뒤덮인 풍경은 그저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필요 없게 느껴진다. 수목이 만들어 내는 시퀀스가 드라마틱하기에 굳이 건축물까지 아름다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수목원의 가장 높은 곳 북쪽 봉우리 전망대 '명정'은 전망대라는 말과 다르게 땅속에 밀려 들어가 있다. 회랑을 만들고 물을 가두어 벽을 다듬었다. 가파른 계단과 돌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만나게 되는 공간은 바깥 풍경이 아닌 자기 내면과 만나는 시간의 장소이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만나는 자연 풍경은 명정을 가기 위해 아름다운 수목원 풍경을 만났던 광경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 마주하게 된다. 즉, 건축가 승효상은 사유원 관람 마지막에서 관람객을 지하로 끌어들여 지금까지 경험하고 느꼈던 모든 것을 되새김하고 자연을 특별하게 경험하게끔 하는 의미로 건축을 한 것이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 인공 연못이 만들어진 땅 위로 뱀처럼 길게 이어진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보인다. 코르텐 재료로 다섯 개의 박스 형태가 띄워져 있는 건물은 인공 연못을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며 천정과 벽면에 뚫려있는 개구부 사이로 해의 기울기에 따라 빛이 스며든다.
누워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의 '와사' 건물은 각각 성당, 식당, 도서실, 침실이다. 그렇다고 건물 내부에 그 모습을 뚜렷하게 표현해 놓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도시의 건축과는 받아들이기 힘든 차원의 공간이다. 단지, 은유적으로 느끼게끔 하여 지형에 따라 높이가 변하는 뿔뿔이 흩어진 공간을 하나로 연결해 유기체처럼 보이게 한다.
광활한 숲에 비밀의 공간처럼 나타나는 건축도 특별하지만 전체적인 경관을 표현하는 조경에도 엄청난 노력이 드러난다. 국내 최고의 조경가로 불리는 정영선이 방향성을 다음고 일본에서 조경의 장인으로 인정받는 가와기시 미쓰노부는 냇가와 정원에 배치될 돌을 계획했다. 사유원의 건축물은 알바로 시자, 승효상의 철저한 계획 아래 기획되기도 했지만 다수의 공간들과 조경들이 기능이나 용도에 집착한 게 아닌, 온전히 오브제로서 가치를 두어 그 쓰임 자체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사유원의 공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짧게는 200년 길게는 600년 넘은 모과나무 군락지와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전하는 자연의 풍광과 곳곳에 나타나듯 나타나지 않는 건축물의 웅장한 콘크리트 벽과 붉게 녹슨 코르텐 강의 이질적인 질감은 오래된 나무와 바위와 조화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사유원 공간 사이사이 쓰여 있는 한자로 적인 현판들과 작은 글귀들은 직접 짓기도 하고 경관을 바라보는 감상의 의미이기도 해 때로는 한 편의 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글을 읽고 사유원을 감상하면 더욱 입체적으로 자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오래된 자연이 주는 위안 속 자연 속 건축과 관계가 맺어질 때 느끼는 시선과 생각은 스스로에게 그 경험의 묘미가 굉장히 크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 운영시간
화요일 - 일요일(매주 월요일 휴원,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운영 후 다음 영업일 휴원)
09:00 - 17:00
*마지막 입장 가능 시간 15:00, 예상 소요 시간: 3시간 - 4시간
- 사유원 주차장 이용
글, 사진 | yoonzak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