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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Jan 20. 2022

존재로서의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이들의 육아

육아는 나의 결핍에 대한 보상일 뿐


"우리 내면에는 여리고 아픈 아이가 한 명씩 있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에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아픈 경험이 만져질 때마다 그 감정과 기억들을 무의식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수십 년 동안 이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모른척한다고 내면 아이가 그곳에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아이는 속삭인다. '나 여기에 있어 나를 피하지 말아 줘' 우리는 그 아이를 내면 깊숙이 밀어 넣고 최대한 멀리 떨어짐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시간을 길어지게 할 뿐이다.


아이를 찾으러 먼 과거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상처받은 아이의 고통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더숲)


엄마와의 관계를 수면 위로 떠올리게 되었던 건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였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가 눈감을 때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중압감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1년도 이렇게 힘든데 평생을 어떻게 키우나' 하는 고민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며 망상에 빠진 탓에 보란 듯이 잘 해내야 한다는 욕심까지 보태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따지고 보면 나에게 대놓고 요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었는데 왜 그렇게 잘 해내고 싶은 것이었을까? 잘 해내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인가? 아이가 그렇게 쉽게 내 맘대로 될 수 있었을까? 이것 또한 나의 큰 착각이자 오만함이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육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올 것이 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던 부모님의 싸움과 가난. 그래서인지 내 기억 속에서 늘 불쌍하기만 했던 엄마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이로서 바라보았던 엄마의 모습에서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상황을 겪기 시작하면서 같은 상황에서 엄마가 나에게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순간순간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기억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와의 기억이 억울함. 화. 슬픔이라는 단어로 얼룩졌다.


상황에 따라 당당하게 맞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당장 코앞의 나의 나약한 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왜 이렇게 욱하고 참을성도 없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말 한마디에 금방 휩쓸리고 괴로움 또한 많은 건지. 내가 생각했던 육아는 이게 아니었는데. '남들은 잘만하는걸 왜 나는 이모양일까' 자책하며 고민하는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날이 추우면 추운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 가난했던 우리 집에는 늘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상심하고 낙담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엄마의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의 엄마가 바라보던 세상은 타인의 호의가 의심스러운 곳이었다. 맞서는 일보다 피하거나 참아야 하는 일이 많았고. 강하게 살아야 했으며 강자에게는 약해졌다. 미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한 곳이라 시도보다는 물러나 걱정하며 마음 졸이는 일이 더 알맞았고, 어쩌다 시도를 하다가 실패를 하면 세상이 무너진 듯 자책을 했다. 세상 걱정의 98%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했지만 나의 엄마는 하루 종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의 걱정을 안 시는 분이셨다. 이미 일어난 일은 자책하며 신세 한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리 걱정하느라 시간이 다 갔다.


"내일은 비가 안와야 할 텐데,  날이 추우면 감기 걸릴 텐데, 교통사고 나면 어쩌나, 직장은 오래 다녀야 할 텐데, 삼촌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날씨와 천재지변, 일상생활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일까지, 세상의 모든 걱정을 떠안고 살았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던 나였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 혼자 집에 있을 때의 나의 취미는 상상해서 걱정 떠안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 취미는 유효했다.)

살아가면서 허용이라는 단어보다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대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너무 막막할 때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네가 젊으니까 더 잘 알지. 늙은 나는 모른다.'는 말로 배우지 못했고 그래 놓고 뭔가 조금이라도 엄마 성에 차지 않으면 눈을 흘겼다. 어쩔 수 없이 찾아본 인터넷 육아는 모두 나와는 다른 세상 속 이야기만 같았고 내상황과는 달라 늘 버겁기만 했다.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으로 태어났다며 작은 일로도 크게 반응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은근히 나무랐다.

서운했다. 엄마는 해결되지 않은 내 안의 상처를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알고 싶어 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니 지금의 나의 이 불안함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불안한 생각이 한번 머릿속에 똬리를 틀면 멈출 방법이 없다. 그 생각이 과거의 상처와 이어지면 미래는 파국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되어버린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과거의 상처와 연결되면 알지 못하는 미래는 알고 있는 불행을 미리 보여주는 '가상현실'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함께 소용돌이치는 상황에 현재가 휩쓸리면 멈추기 어렵다. 무서운 것은 엄마가 드라마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될수록 아이는 정서적으로 방치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김경림/메이븐)


아이를 키우면서 작고 사소한 일에서까지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상황이 잦은 이유가 나의 어린 시절의 결핍에서 왔다는 사실을 안지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나이가 다되어서 까지도 육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조차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남들을 따라 하며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살았었다.

'일어난 일은 어찌할 수 없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한지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받아들임'을 하지 않고 일어나는 상황마다 '저항'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할 때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무난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났다. 뒤처질까 봐 주변을 살피며 혼자 고군분투하며 어설픈 육아를 하는 나와는 다른 무난하다 못해 밍밍한 친구였다.


대학 다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었다. 그 집에는 나보다 2살 많은 친구의 오빠가 있었고 친구가 왔는데 먹을 게 없다며 계란을 삶아 주었다. 셋이서 맛있게 먹고 있는 도중 친구의 어머니가 오셨다. 사실 속으로 혼이 날까 봐 맘을 졸였다. 예전에 나의 엄마는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 '그거 저녁 찬거리인데'라던가 '몇 개 안 남았는데'라는 말을 보태어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삶은 계란을 먹고 있는 우리를 보고 '너희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아이고 진짜 다 키웠네'라고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뚝딱뚝딱 저녁을 만들어 주셨다. 어릴 때조차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나는 엄마가 일을 한다는 이유로 하나부터 열까지 뭐든 내 힘으로 해야 했고(아니 해내야 했다) 어린 내가 했던 일들이 엄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보태거나 혀를 찼다. 그래서 늘 꾸지람을 듣지는 않을까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했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태어날 때부터 꾸준히 따뜻한 사랑을 받아왔던 것처럼 보였다.

친구의 엄마도 친구의 어린 시절부터 식당에서 일을 하셨고 아직까지도 식당에서 일을 하신단다.

바쁘신 와중에도 여전히 친구에게 반찬을 만들어 주시고 그 반찬통 안에 용돈을 넣어서 보내주신다고 했다.

엄마의 배부른 사랑을 먹고 자란 덕인지 이 친구는 갈팡질팡 하며 '아이가 엄마인 날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나만의 두려움이다) 없이 싫은 소리도 척척하며 흔들림 없이 소신 있는 육아를 해내고 있다.


친구와 비슷한 육아를 하는  다른 한 명의 언니도 있다. 신랑의 친한 친구의 와이프다.

언니는 고등학교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아 (엄마일 때문에) 혼자 따로 나와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학교 친구들과 사건에 휘말렸고 화가 나신 선생님은 교무실로 관련된 학생의 모든 엄마를 불렀다고. 사고에 연관된 언니와 친구들은 교무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각자의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고 엄마가 한분씩 오실 때마다 친구들은 끌려가다시피 집으로 향했고,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던 언니도 혼이 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고 했다. 때마침 엄마가 오셨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엄마는 언니를 데리고 학교에서 나왔다고.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언니의 엄마가 언니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신발가게였단다.

친구들과 교무실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모습 속에서 혼자 신발이 너무 낡아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신발부터 사주셨다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엄마의 진심을 아는 언니는 올바르게 자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 느끼는 바가 많았다.

신랑과 나의 부모님은 "우리의 감정보다 본인의 감정과 타인의 시선이 더 우선시하시던 분들"이셨기에

같은 상황에서 20년 가까이 지켜본 신랑의 어머니셨다면 '남보기에 부끄럽게 이런 신발 신고 왔나'하며 엄마 얼굴이 창피하지 않을 만큼 비싼 신발을 빚을 내어서라도 사주셨을 것이고, 40년 가까이 지켜본 나의 엄마였다면 분명 앓아눕거나 매로 혼을 냈거나 애초에 내 신발에는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약한 마음을 가진 우리 둘이서 아이를 하나도 아닌 둘이나 낳아서 키우니 괴로움의 무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육아의 어려움에 대한 실마리가 풀렸다.

육아를 배워본 적이 없던 나는 엄마의 기억을 더듬어 엄마의 육아를 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내가 그토록 받고 싶었고, 해보고 싶었던 것들(결핍) 그리고 내가 열등감을 느낀 부분을 내 아이도 겪지 않도록 채워주려고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고마워할 것'이라고 지금의 이 아이도 나의 어린 시절의 그 아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아이는 '나의 어린 시절의 나'가 아니라 완전 다른 개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동안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는 욕심을 통해 나의 그릇에 넘치는 지나치게 과한 육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그릇을 과대평가했다. 아니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을 따라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 힘에 부치는 게 당연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아야 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고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고 있었는지 이제는 분별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가 내 아이에게 특별히 해줄 만한 것은 없었다. 단지 진심 어린 순수한 사랑만을 주면 될 일이었다.


아마도 내 친구와 그 언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 그대로 아이를 키우면 된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자잘한 일들에는(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마음의 동요가 없는 지금의 편안하고 안정적인 육아는 당연해 보였다. 그동안 무난하고 편안한 육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봐도 별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던 까닭은 그냥 본인이 자라 온대로 키웠기 때문인가 보다.


힘들지만 어린 시절의 나를 자꾸 떠올리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내 나름대로의 치유과정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아팠던 기억들을 외면하며 살았을 때를 떠올려보면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상황들이 눈앞에 펼쳐질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매번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당시에 느꼈던 고통들이 해일처럼 나를 덮쳐오는 것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내마음은 중심도 없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렇게라도 그 기억들을 꺼내어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줄여주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척했던 그 어린아이가 어느새 또 내 눈앞에 나타나 주저앉아 울고 있을 것이고 그럼 나는 또다시 예전처럼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아이와 함께 머물게 될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은 그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좋은 기억은 오래 머물고 아픈 기억은 피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의 깨달음이 나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이제는 믿는다. 내가 이렇게 확고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나 스스로가 더 이상 8살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제도 오늘도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 시절의 나를 더 어르고 달래서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돌려본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웃으며 날 떠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상처받은 아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아이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어쩌면 아이가 슬퍼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느껴지면 호흡을 하면서 '네 안에 슬픔이 있는 것을 알아. 그동안은 내가 바쁘게만 살아왔어. 하지만 이제는 내가 너를 안아줄게.' 하고 말한다. 감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잘 보살피는 것이다. 상처받은 아이를 알아보고 부드럽게 안아 주는 것은 아픔을 덜어준다. 다루기 힘든 감정은 여전히 남겠지만, 아픔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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