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를담다 May 21. 2022

정밀아/ 존재의 이유를 가르쳐 준 노래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또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어둠의 터널이 끝이 없어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숨고만 싶었다. 타인의 평가가 두려웠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웠던 것 같다.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기보다는 나를 보는 타인을 의식하느라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다. 어두운 환경이 들키는 게 두려워 과장되게 웃고 속마음과는 다르게 밝은 척을 하며 지냈다. 굳이 내입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 좋은 환경 속에서 걱정 없이 자란 사람 같이 보였기 때문에 내가 세운 계획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내가 아니었다. 그건 단지 사회가 원하는, 타인이 원하는, 가족이 원하는 역할과 이미지를 부여해 만들어진 자아상의 모습일 뿐이었다.


오로지 내가 해내야만 할 일이 가득한 곳에서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 역할을 해내곤 했었다. 그렇게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유지하려다 보니 예민한 나는 더 애를 쓰며 꼿꼿해졌고 감당하지 못할 크기로 부풀려진 자아상의 모습 때문에 별것 아닌 진짜 내 모습이 들통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무기력해질 때마다 도태되지 않으려 나를 다그치며 때론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나를 알아달라고 아우성치다 조금이라도  이해해줄 것만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착각할 때면 그 순간을 놓칠세라 하소연하기도 했고, 그와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면 예민한 성격을 흉기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두 다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외부와 연결된 창문 하나 없이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커튼까지 치고 숨어 살다 겨우 나온 아파트에서 나는 오로지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다. 아니 신랑과 나의 힘으로 만든 이 공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랐던 행복도 잠시 스쳐갔을 뿐, 이번엔 내가 가진 집이 너무 낡고 오래되어 또다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고 윤택해져 갈 때마다 나는 내 삶보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결혼을 해야 된다고 해서 결혼도 했고, 집도 사야 한다고 해서 집도 샀고, 아이는 둘 낳아야 된다고 해서 아이도 낳았는데 다시금 그다음 일을 생각하자 까마득해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렸다.

늘 '생각했던 것만 생각하고' '했던 것만 하도록' 길들여진 나는 어김없이 전과 같은 패턴을 유지하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나이는 한 살 한 살 보태어지는데 '전과는 다른' 방법을 몰랐기에 여러 말들이 내 주변을 화살처럼 날아다녔다. 나만의 기준이 없었던 탓에 걸러지지 않은 정보가 넘치는 곳에서 내 것만을 골라 꼭꼭 씹어 소화를 시킨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오늘도 나가서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세상과 어울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린 단지 스스로의 내면에 이미 입력되어 있는 이야기 언저리를 한 번 더 맴돌다 왔을 뿐이다. 익숙한 줄거리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는 정보는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아는 길만 더 탄탄하게 다지고 왔을 뿐이다. 그래서 사는 게 점점 시들해진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곽세라/샘앤파커스> 


정답지가 있는 것도 아녔건만 늘 오지선다 정답을 찾듯이 다른 이들과 나를 비교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타인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은 분명 시작부터가 달랐는 '땅'하고 시작을 같 하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시작이 아니라 끝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끊임없이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따라 하고를 반복했다. 정답이 없는 곳에서 정답을 맞히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무슨 배짱이었는지 나는 정답을 알고 있는 듯 행동을 했다. 늘 나를 증명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다가 살림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눈덩이처럼 늘어나 어느새 한계에 부딪혔다.


연습 없이 어른이 된 나는 늘 나의 쓸모를 찾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정말 만질 수 있는 돈의 액수로 매겨져야만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나의 쓸모의 원천은 가진돈이나, 타인의 칭찬, 비교를 통해서일 뿐이었고 그때마다 우월함을 드러내며 가까스로 나를 증명하여 어른들을 안심시키거나 때론 지인들의 말을 잠재우곤 했다. 개인의 기준이 모두 달랐지만 타인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는 방법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상대의 손에 넣고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기회를 었다. 뚜렷한 근거 없이 부풀려진 내게 높은 점수가 매겨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와이프. 엄마. 며느리. 딸. 학부모. 직원. 동생. 누나. 언니.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런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이름표인 고객. 회원. 이웃. 지인. 심지어 길거리를 지날 때면 단정하고 도도해 보이는 행인의 역할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것은 강박이었다. 누구도 시키지도 않은 다양한 역할들을 해내느라 지나치게 감정이 앞선 나머지 위에 나열한 사람들의 감정과 상대편의 반응까지 모두 가져와 원래부터 내것 인양 떠안았다. 그렇게 불필요하게 소모적인 일을 하면서 나의 에너지는 서서히 고갈되어 갔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암묵적인 룰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에게 스스로 태어난 이유를 물으며 그간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세상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여하기 위함이라 이야기했고, 가족들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슬프거나 부당한 일도 응당 떠안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했다. 시어머니께서도 네 역할은 이것이라며 또렷한 선을 그어 주셨고, 나 때는 너보다 더 힘들었으며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 이야기하셨다. 그 속에는 암묵적인 규율. 규칙은 있어도 개인적인 차원의 배려는 없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우리는 원래 이러니 이곳에 함께 있으려면 이렇게 해야 돼' 라며 다양한 이유를 들어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라 했다. 혹여나 한마디 말을 덧붙이면 '남들은 그냥 하는데, 넌 별나다'라고 했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주입식 교육의 한계였을까?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혼자 튀면 그들 무리에서 소외될까 두려워 '네네' 하며 작은 의심조차 고이 접어둔 채 주어진대로 살았던 것이 문제였다.


당장 수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면의 나는 나의 의견이 수용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결핍이 생겼다.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했다. 내가 이야기를 쏟아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늘 외로움과 씨름을 하며 감정을 앞세워 내편을 찾아 헤매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다 보니 당연한 이치로 칼자루는 항상 상대의 손에 가 있었고 그들도 자기만의 또렷한 색깔들을 고집하며 그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찾는 것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인해 나는 또 다시 크게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혼자가 익숙한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스스로를 미더워하지 못한 나에게 진짜 내편이 있을  만무했다 생각한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나는 나를 되돌아 보며 세상의 큰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고, 삶은 결국 혼자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인 듯 보여도 꼭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정신분석가인 코헛(Heinz  Kohut)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타인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열등감이 심하고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니 하나같이 어릴 때 자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부모가 없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왓칭/김상운/정신세계사>


아이가 상처를 받을 때 상처받은 마음을 비추어 바라보도록 하면 그 상처는 사라진다고 한다. 어릴 땐 부모가 이 역할을 해주지만 어른이 되면 이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간다고. 나는 위와는 반대로 자기감정을 앞세우는 부모 에서 자랐다. 주문처럼 외는 '아이고 우짜노'라는 말이 너무나 듣고 싶지 않아 못하는 것을 감추고 잘하는 것만 보여주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었고,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게 힘겨웠다. 그러다 문득 '나의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어디선가 매일 끊임없는 질문이 들려왔다.'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네 삶은 누구의 것인가.. 너는 지금 행복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바다에 가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고를 반복했다. 어느새 내 도처에 감정 흡혈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의식 중에 알 수 없는 사명감을 띠고 살아왔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며 나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무기인 줄 알고 휘두르다 그 무기에 내가 다치고 있는 모습들을 마음으로 아주 생생히 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이 가족에게 씌우는 프레임 혹은 세상이 나에게 씌운 프레임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를 다그치며 이게 나야, 하고 규정짓던 경계가 허물어질 때 즈음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어그러질 때 우연히 이 노래를 만났다.


'꽃'이라는 이 노래가 나는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가득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건 아무런 이유도 없고 단지 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살면서 단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내가 그토록 듣고만 싶었던 나의 존재의 이유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사회에게,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나를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 노래가 이야기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나를, 내 주변을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속엔 나는 없었고 타인만이 있는 듯했다. 그리곤 그보다 더 깊이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더니 그 속엔 오로지 나만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오로지 상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그곳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의식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맞춰주며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는 내가 있었다. 내 마음속의 정답은 정밀아의 '꽃'이라는 노래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노래를 통해 나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잠재우기도 했고, 시기심과 질투심, 불안함, 초조한 감정도 이따금씩 내려놓기도 했다.


동해에 살면서 깨달은 건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삶터뿐 아니라 어울리는 사람, 자주 가는 공간, 매일 보는 책과 영상도 환경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환경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서울은 지나치게 빨랐다. 아무리 마음을 느긋하게 먹어보려 해도 지나치게 바쁘고,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만나면 삶이 금세 못마땅해지고 생기를 잃었다. 마음을 곱게 먹어보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이 있었다. 내 삶이 좋아지려면 환경을 바꾸어야 했다.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류하윤x최현우/위즈덤 하우스>


하나씩 하나씩 무거운 겉옷을 벗어던졌다. 평탄한 결혼생활을 위해 가장 리얼하게 연기했던 시댁에서부터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그다음은 친정, 엄마, 언니, 주변... 크게 상처받지 않을 만큼 차츰차츰 범주를 좁혀갔다. 한동안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으면 살점이 뜯겨나갈 정도의 괴로움이 또다시 반복될 것만 같았다. 나에겐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나만의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며 어느새 내 선에서 걸러지지 않는 정보는 모두 '상술'이라 여겼다. 재주나 잔꾀를 내어 물건을 팔아 내 돈을 빼내어 가는 것만이 상술이 아니라 소리 없이 다가와 은근히 내 삶에 스며들어 나의 감정을 야금야금 앗아가 버리는 것도 내 기준으로는 상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남편을 내렸습니다. 남편의 아버지 어머니를 내리고 아이들도 내렸습니다. 그리고 등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내리고 보니 그들이 업힌 것이 아니라 여자 스스로 업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자는 업고 업히는 삶이 누구에게도 행복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행복의 시작임을 배워갑니다. 여자는 일 인분으로 살아갑니다. <며느리 사표/ 영주/ 사이 행성>


더 이상 내 삶이 더 좋아질 만한 것을 보태는 쪽이 아니라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을 만한 것들을 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보태기(+) 보다 덜어내는(-) 쪽을 택하며 이전보다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구간을 만들어갔다. 철저하게 혼자를 고집하며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져 보았더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어렴풋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그림을 보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이 참에 더 이상 나를 속이지 말고 진실되고 솔직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따뜻함. 소박한. 진실함. 충만함. 사랑. 존중. 배려를 떠올리며.


오랜 시간이 지나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바라보았더니(watching)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딱히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그랬다. 마음속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 본인의 결핍이었거나 자신의 기대치가 나에게 반영된 것일 이었다. 그건 본인의 안위를 위한 것이지 실제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조각가가 돌로 조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자기 자신'의 얼굴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이 내 얼굴만 힐끗 쳐다 보아도 거울을 찾았다.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머리가 흐트러진 것은 아닌지. 모든 게 나의 문제인양 끊임없이 나 스스로만을 점검 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 그 누구도 나에 대해 먼저 묻지 않았고 진지한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았던것 같다. 다들 자기의 이야기를 하느라 분주했고, 나처럼 들어주는 사람들을 찾느라 눈동자들이 흔들렸을뿐. 그 모습들을 떠올리며 관심이 필요한 나의 입에서 나온 무수 한말들도 '모두 공중에 흩어져 버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최근부터는 말을 줄이고 귀를 열어 정성을 다해 듣는 연습을 시작했다.


재롱잔치 때 내가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는 온 세상에 내 실수를 들킨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온 세상은 내게 딱히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과 동물과 장소 등은 사실 아주 적었다. 세상의 극히 일부여서 오히려 외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이슬아/문학동네>


잘 있다가도 아이 하원 시간이 되면 온몸에서 진이 쭉 빠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곳에 나의 중요한 에너지의 상당한 양을 써버렸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곳에 많은 양의 에너지를 쓰다 보니 정작 써야 할 곳인 아이들과 신랑 앞에서는 무기력한 모습들을 많이 보였다. 반성한다. 이제부터라도 내 모습을 직면하여 또렷이 눈을 뜨기로 마음 먹었다. 지갑에 든 돈도 쓰면 쓸수록 비어버리듯이 내가 하루에 쓸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도 마찬가지였다. 무의식 속에서 중심 없이 눈앞의 일을 해치우는데 급급하거나 예전일 혹은 미래일을 떠올려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쓸 때마다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아이나 신랑에게는 나의 개인적인 불안감이 덜 전달되도록 내 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하루 에너지양를 알고 적당한 곳에 알맞게 쓰도록 잘 분배하는 연습을 했고.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비법은 어제도 내일도 조금전도 아닌 '지금'을 사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계산해 견딜 수 있는 하루 총에너지양을 가늠해본다. 머리가 복잡한 날은 꼭 바다에 가서 심신을 단련하고, 피곤한 날은 운동을 줄이고, 할 일이 많은 날은 꾸준히 일만 하다 10분이라도 황홀한 낮잠을 자며 에너지를 보충한다. 나에게 자극이 될만한 것들은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좋지 않은 에너지보다 좋은 에너지를 받으려 신경을 쓰고 그 전달된 에너지를 통해 상대에게도 나의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윤여정 배우의 말처럼 나도 39살은 처음이니까. 조금씩 나아지는 내 모습을 기록하며 그렇게 그렇게 나와 잘 지내고 있다.


글을 처음 쓸때의 나는 자기연민에 깊이 빠져있었다. 나를 과거의 결핍 때문에 사랑이 받고 싶어 애를 쓰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규정지으며 모든것을 가족과 타인의 탓으로만 돌렸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며, 글을 써나가다 보니 나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보다 타인에게 미움을 받을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글쓰기는 예전에 고통이라 여겼던 나의 나약함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선물했다. 나의 결핍을 하나씩  꺼내다 보면 이런 나를 남을 보듯 흥미롭게 여기며 '나에게 이런면도 있었나'하고 흠짓 놀라기도 한다. 가끔씩 상처를 받긴 하지만 그런 감정이 꼭 싫지만은 않다. 나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면해 가며 단단한 벽을 조금씩 허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미세한 금밖에 가지 않았지만 지금부터 서서히, 조금씩,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를 하게 된다. 그것이 내가 오늘을 살아내는 방법이 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법정>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이 된다는 건(겨울왕국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