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와 수다 떨며 걷다 본인 키 보다 큰 유모차를 맹렬하게 밀고 오는 아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쳐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뼈가 부러졌다. 강제 감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감금 생활 4일째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지 궁리 중이다. 약 때문인지 11시 전에 잠이 들어 일찍 깬다. 그전에는 덥기도 하고 갱년기 때문인지 수면 패턴이 일정치 않아 일찍 일어날 때도 있고 늦게까지 자야 할 때도 많았다.
11시에 잠들어 아침 7시까지 푹 자고 일어나니 컨디션이 좋았다. 조용한 거실에서 오랜만에 모닝 페이지를 썼다. 쓰다 보니 내가 오랜 시간 품고 있던 ‘생활 속 예술가 되기’라는 주제의 글이 자꾸 써졌다. 맨날 똑같은 내용인데도 쓰고 또 쓰면서도 즐거워졌다.
유아교육 강의를 하면서 느낀 예술 과목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가능성, 유아들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와닿는 그 내용들에 대한 생각이 늘 나를 사로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아이디어를 좋은 글로 남기고 싶은 생각과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늘 품고 있었다. 강의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학생들과 수업하던 그 시간들 속에서 확실하게 느낀 행복감이 계속 그 생각에 머물게 한다.
유아문학 활동 중에 ‘저널 쓰기’라는 활동이 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거나 쓰고 싶은 내용을 표현하게 하는 활동이다. 저널 쓰기를 글쓰기에 진입장벽이 높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대학생들이나 성인학생들과 진행해도 굉장히 효과가 있었다. 말이 어려우면 간단하게 그림을 그리면 되고 그림이 어려우면 한 두 줄로 쓰고 싶은 내용을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총체적 언어> 교재에서 가져온 저널쓰기 자료
그렇게 사소한 활동이라도 하고 난 후에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굉장히 뿌듯함을 느끼는 표정을 보았다. 유아를 지도하기 위해 배우는 활동이라 처음엔 시큰둥하다가도 어느 순간 몰입하면서 정말 재밌어하고 분명한 성취감의 기쁨을 느낀 표정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상기된 아이 같은 밝은 얼굴을 보며 이런 활동이 어른들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미쳐 유아기와 아동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그 활동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작지만 성취감과 행복감을 주는 경험을 수업 중에 많이 했다. 미술활동, 동작 활동, 문학 활동, 음악 활동할 거 없이 늘 평가받고 잘하는 소수만이 돋보이던 수업에 익숙해져 움츠러 들었던 어른들이 다시 유아기의 생기를 되찾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보여주었던 ebs의 다큐멘터리 중 <이것이 미래교육이다 : 1화, 영국 슈타인 학교>에서 본 내용도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다. 발도로프 프로그램을 실천하고 있는 영국 학교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 여기서 자세한 발도로프 프로그램을 소개하기보다는 나에게 인상 깊었던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7학년 수업시간에 교사가 인쇄술의 역사에 대한 수업을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전하고 있다. 연관된 사실을 묶어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학생들은 역사 속 인물이 되어 편지를 써보는 활동을 하거나 그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그림을 곁들여 자기만의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위에서 유아 문학 활동으로 소개한 ‘저널 쓰기’와 거의 흡사한 활동이다.
수업이 교과목별로 방대한 사실 전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택한 소재를 이야기로 꾸며 소개된다. 이 영상에서 보여주는 인쇄술에 대한 역사수업은 르네상스가 시작된 부분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업인데 이전에 배운 수학의 대수로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음수를 가르치면서 이전에 배운 양각과 음각의 인쇄활자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올해는 흑백그림을 배우고 있는데 음수와 양수에 대입하여 미술수업과 연관 지어 소개한다고 한다. 판화와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판화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역사 수업과 수학과 연관 지어 자연스럽게 미술활동으로 확장되게 하는 것이다.
유아교육이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유아교육은 교과별 수업이 아니라 한 주제나 놀이를 통한 교과 간, 발달 간 통합교육을 지향하는데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그 방식을 고학년까지 유지하고 있고 예술과 모든 교과를 통합하는 것에 늘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학생들이 이해한 내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도록 지도한다. 그 다큐를 보면서 내가 만들고 싶은 어떤 창작물의 현현을 본 것 같아 인상 깊었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 알게 된 것들을 그렇게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유아문학 수업이나, 미술 수업 등에서 작은 책을 만들어보거나 프로젝트 수업을 한 후 아이들이 발견하고 알게 된 것을 그림이나 주변의 재료들로 만들어 보는 작업 활동, 노래, 리듬 패턴 만들어 보기, 동작표현 등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보게 한다. 그것이 유아기로만 끝나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심지어는 유아교육에서도 이런 식으로 제대로 운영되는 기관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초등 교육 때까지라도 유지된다면 아이들이 자신의 관심 분야를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고 예술적인 것, 학문적인 것 자체에 관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텐데. 입시가 끝나거나 취업을 하고 나면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싹 잊게 되는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본질적인 흥미와 관심으로 평생 갖고 갈 수 있는 분야를 갖은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다큐를 보면서 잠깐 들은 인쇄술 이야기가 내가 몇 년간 중, 고등학교 시절 배운 역사적 지식들보다 기억에 남았다. 태평양에 고무오리가 가득 실린 컨테이너 선박이 난파되어 거의 5년을 떠돌았다는 기사에서 시작된 또 다른 수업이야기도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았다.
북극에서 아메리카 해안을 거쳐 조만간 조류를 따라 영국 해안까지 흘러 올 거라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기사 하나를 통해 조류의 흐름과 더불어 지구 전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최근의 해양 기사를 보면 고무오리가 세계를 떠돈다는 사실도 재밌지만 과거 탐험가들이 대양을 건너 미국을 거쳐 동양으로 가는 항로를 어떻게 선택했는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행복을 주는 일은 대단한 것에 있지 않다. 자신의 관심 분야를 알고 일상의 작은 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고 뭔가를 해내고 따라가는 과정에 있는 거 같다. 그게 대단한 작품이 아닐지라도 그런 작은 그림 한 장, 알게 된 것을 정리하며 혼자서 느끼는 뿌듯한 기분, 그런 것들 아닐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고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평생 그런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내가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있어 나도 모르게 매일 쓰게 되는 이런 이야기들이 큰 행복감과 의미를 선물하듯이. 난 계속 이런 주제를 확장해 나가고 내 삶에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