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현대 사회 생존법>을 읽는 중 “교육 제도는 생산성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인간의 행복 중 3분의 2가 정서적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살아가며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은 자신의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 감정 속에 숨겨진 진정한 욕구를 찾는 일이다. 감정의 일렁임이 생길 때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서 진짜 원인을 찾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아직 언어소통에 미숙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울거나 고집 피우는 건 어딘가 불편한데 그게 뭔지 알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늘 관찰하는 애정 어린 보호자는 아이의 울음이나 고집을 이유 없는 것이라 속단하지 않고 아이의 요구를 재빠르게 알아차린다. 그렇게 자신의 욕구가 정확하고 세심하게 채워지는 아이들이 안정된 정서와 성격의 어른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유아발달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현실은 그렇게 세심한 돌봄을 받고 자라진 못한 부모가 또 그렇게 자식들을 돌보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일이 흔하다는 거다. 그렇다 보니 어른이 돼서도 자신의 불편한 감정의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해 주변을 괴롭히고 자신마저 망가뜨리는 사례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금쪽이 류 프로그램 속에는 정서적으로 미숙한 어른들에게 한 번도 제대로 감정을 알아봐 준 사람이 주위에 없었음을, 그래서 그도 진짜 마음이 뭔지 모른 체 가족들을 괴롭히며 문제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매주 나온다.
그런 문제가 교정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만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정서 문제를 겪고 있다. 이론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그걸 배우지 못해 평생 창문에 머리를 부딪는 파리처럼 엉뚱한 곳만을 부딪치며 스스로 상처받고 주변을 괴롭히며 살고 있을까? 창문을 살짝 열어주는 정도로 마음의 평화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세심하게 감정을 읽고 알아차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된다. 그러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그렇게 세심하게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면 된다. 부정적이고 불쾌한 감정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냥 눌러버린 채 돌아다니면 안 된다.
그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많이 쌓일수록 깊어질수록 결국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만다. 어른들조차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아이 옷의 목 뒤 상표만 떼면 웃으며 편안하게 놀 수 있다. 그 간단한 일을 이제부터 하면 된다. 아이가 특정한 옷을 절대로 입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아이도 어떤 이유에서 그 옷이 입기 싫은지는 잘 모른다. 단지 그 옷을 입었을 때 어딘가 까슬거리며 아프고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라 입기 싫은 거였다.
그걸 모른 채 엄마는 억지로 입히려 하고 아이는 고집을 부리며 문제를 키우는 것 같은 일들이 어른들에게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옷을 입은 채 살게 되면 잠시라도 그 고통을 잊게 해 줄 중독에 빠지기 쉽고 수첩에 빼곡히 일정을 만들어 피해 다니게 된다. 가위로 살짝 떼 주면 되는데 평생 택을 붙이고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오랜 시간 그 불편함을 피해 다니며 나를 돌보지 못했을 때 무력하고 우울했다. 자주 화가 나고 세상 모든 게 불만이었다. 그 마음은 자꾸 착하고 만만한 가족들에게 향했다. 답답한 남편과 맘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 탓이라는 생각에 자주 화를 내고 자책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그걸 잊기 위해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고 술을 마시고 쇼핑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늘 불안했고 알 수 없는 분노가 부풀어갔다. 피해의식과 억울함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것이 한계에 다다르고 안 좋은 결과가 조금씩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위기감에선지 책을 찾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의 알 수 없는 고통은 진짜 원인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평생 엄마의 비논리적인 말을 따라야 하고 그러지 않았을 때 들었던 폭언과 비난, 어떻게든 잘못을 만들어내 혼내는 화법이 나의 억울함과 분노의 원인이었다. 그 불편함과 분노의 원인을 아무 잘못도 없는 남편과 아이들, 주변 사람들에게 돌렸던 것이 나의 생활을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엄마가 분노의 화살을 가장 약하고 만만한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돌렸던 거처럼 나도 그러기 시작하고 있었다.
끔찍했다. 점점 엄마 같은 사람이 되는 걸 멈춰야 했다. 내 자식도 나처럼 지옥 속에 살까 두려웠다.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나의 억울함과 분노의 정확한 대상을 알게 되자 가족들에게 화낼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남편과 시댁식구들,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일로 나를 비난하거나 폭언을 하지 않는다. 그걸 깨달자 가끔씩 감정의 소용돌이에 잠식당해 화를 폭발하는 일이 사라졌다. 사소한 문제는 대화와 사과 한 번으로 쉽게 풀어지곤 했다. 심각하게 화를 내고 큰소리가 나는 일은 늘 엄마하고만 생겼다.
지금은 그 누구와도 잔잔한 감정 속에서 작은 문제들을 그때그때 해결하며 살고 있고 나의 마음속 소용돌이는 잠잠해졌다. 여전히 가끔 올라오는 부정적 감정들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엄마와의 양가감정뿐이다.
내가 좀 더 일찍 감정을 다룰 줄 알았다면 감정의 진짜 이유를 알았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지옥 같은 내면을 이해해 주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을 거고 그 감정을 피해 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상처 주는 말과 폭언에만 포커스를 맞추지 말고 그때 느껴지는 내 감정에 더 관심을 집중했다면 그래서 엄마와 거리를 두고 잘 지낼 다른 방법을 지혜롭게 모색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든다.
마음 챙김이나 심리학책을 많이 읽다 보니 그런 역학관계가 보이게 됐다.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엄마에게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막연한 죄책감으로 제대로 인정하지도 못하고 무의식에 쌓아온 분노와 억울함의 감정에 나 자신까지도 잡아먹힐 지경이었다.
한 가지 잣대로 재단되는 효의 관념이 나와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겹겹이 괴롭힌다. 자식을 고통 속에 살게 하는 부모가 분명히 있다. 그걸 인정하는 일에 더 이상 죄책감의 벌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에게 학대받은 고통에 부모에게 친절하지 않은 나쁜 자식이라는 사회적 불명예까지 떠안는 억울함의 화신이 된다.
정서적 학대를 당한 게 맞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런 인정을 하는 나를 더 이상 스스로조차 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된다는 걸 책을 읽고 배웠다.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고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래서 무의미하게 자책하고 도망 다니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일찍부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감정과 정서문제를 다루는 법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면 사회의 많이 문제들이 사라질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