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을 설쳤다. 이주 전부터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병원에서는 감기는 아니고 알레르기로 인한 기침인 거 같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비염이라고 하더니 면역력이 떨어지니 자꾸 알레르기 질환이 생긴다. 약을 먹으니 입맛도 없고 계속 졸린다. 그런데도 아들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자 신경이 쓰여 잠을 설쳤다.
군대에도 다녀온 24살 건장한 청년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도 오십몇 년간 습관적으로 돌아가던 생각과 불안이 내 이성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꿈 인지 내 생각인지 ‘그래 젊을 때 저렇게 놀 수 있지, 괜찮아, 아니야 그래도 저러다가....’ 하면서 파국으로 달려가는 두 가지 생각이 밤새도록 나를 괴롭혔다.
제대하고 정신 차리고 공부에 열중하겠지 싶었던 기대와는 다르게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우다시피 늦게 들어오고 누굴 만나는지 분주한 아들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그래 요새 히키코모리도 많다는데 찾는 사람이 많아 바쁜 게 좋지’, 하다가도 정도가 심해지니 걱정의 마음이 자꾸 머리를 내민다.
결국 아이는 밤을 새우고 이제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 얼굴을 보고 화를 내지 않을 자신이 없어 몸이 힘든데도 짐을 싸서 카페로 도망쳐 나왔다.
군필 성인이고 본인도 뭘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젊음을 만끽하며 놀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겠고 놀아야한다는 것도 안다. 나도 젊어봤는데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다 이해하고 아는데도 왜 내 이성과는 다르게 불안에 잠을 못 자고 뒤척이며 지금까지 굳어져온 습관적인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다스려야 할 굳어진 부분이 생각보다도 단단한가 보다.
이러면서 점점 아이에게서 내가 독립하게 되는거 같다. 기대를 버리고 불안을 온전히 혼자서 다스리며 말 그대로 아이를 독립된 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다. 29살, 24살 아이들 인생에 더 이상 깊게 들어가서도 안되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내 삶에만 집중하는 노력을 한다.
글을 쓰며 생각을 점검하고 이성의 힘을 빌러 교정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 혼자 맛있는 순댓국 한 그릇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간질간질한 목을 따뜻한 캐러멜 마키아토로 다스리며 시원한 카페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사실 별 일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가 생긴다면 생겼을 때 해결하면 된다. 미리 문제를 만들어 파국으로 치 닿는 습관을 고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있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이제는 그 틈을 찾아 이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가 침착하고 안정된 사람인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자존감도 올라갔다.
요즘 조금 안정된 사람이 된 거 같아 기쁘다. 가족과의 문제뿐 아니라 주변의 인간관계도 잘 정리하고 있다. 물리적 환경을 잘 정리하듯 머릿속도 정리가 되어 삶이 단순화되고 마음 정리가 되고 나니 쓸데없는 고민의 시간이 줄었다.
나만 노력하면 해결될 문제인지 그 노력을 계속할만큼 진짜 소중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일, 이런 고민을 계속 할 가치가 있는 관계였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니 명확해졌다.
정말 소중하고 좋은 사람은 나를 오랜 시간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지고 만날 시간이 기대가 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관계에 대해 오랜시간 고민하고 그의 말을 곱씹을 일이 없었다. 날 오랫동안 헷갈리게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면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짧게는 17년에서 20, 30년이 넘는 관계들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를 헷갈리게 하고 이건 아닌데 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관계였다는 증거다.
나는 한 사람을 단 번에 판단하고 내치는 스타일은 아니다. 긴 세월 동안 맞춰보고 참아주고 기다리는 편이다. 그런데 그 긴 세월 동안 그 사람의 말처럼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관계라면 내 생각이 맞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난 남 탓보다는 늘 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틀렸는지에 대한 의심을 먼저 하는 에코이스트였다. 내가 불편해도 맞춰주면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참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식의 만남을 긴 세월 하다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에너지가 부족해졌는지 힘들다. 내가 맞추는 걸 멈추면 멀어질 관계였다면 이제는 손을 놔도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내가 애쓰는 걸 멈춰서 끊어질 관계라면 이제 놔주겠다.
마음 정리를 하고 나니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예전처럼 오래 끌지 않고 금방 멈출 수 있게 됐다. 내가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화나지 않을 만큼만, 할 수 있을 만큼만 친절하게 배려하겠다고 결심해 본다.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요구는 거절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그래서 멀어질 관계였다면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렇게 주변관계에 대한 정리를 명확히 하고 나자 가족에게 사랑과 친절하게 대할 여유가 많아졌다. 가장 소중한 가족들에게 오히려 막 대한 적이 많았다. 화내지 않고 이성의 힘을 발휘할 만큼의 에너지를 늘 비축해두어야 한다. 내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난 왜 그 정도도 너그럽게 봐주지 못 하는 옹졸한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게 하고 ‘그 정도는 배려하는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 고 다짐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힘을 낭비하게 않겠다. 상대를 합리화해 주고 방어해 주는 일까지는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관계가 오래되면 결국 나에게 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