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군중에 가장 좋아하는 직업이 있다. 소방관과 경찰관이다. 소방관과 경찰관들의 시민들을 위한 희생정신을 보며 그들의 직업적인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늘 마음속에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이 있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 사회복지사 3년 차에 해당과가 개설되어 있는 전문대학에 전화를 걸어 학과 교수님과 통화를 했다. 그 교수님께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그리고 답변은 소방관이라는 직업군도 계급이 있어 전문대 3년을 졸업하면 네가 30대가 넘는다. 그리고 혹 시험에 낙방을 하게 되면 더 많은 나이가 될 수 있는데 너보다 어린 나이의 사람이 상사가 되면 많이 힘들 거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도 충분히 사회에 기여를 하는 직업이니 더 열심히 지내면 좋겠다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수님의 현실적인 조언은 참 좋았지만 그 의견 무시하고 꿈을 펼쳐보았으면 지금 내 삶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무시해도 나쁘지 않았겠다 싶다.
시간이 지나 한 청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소위 위기청소년으로 상담이 의뢰된 18세 남자 청소년이었다. A군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세상 온순하고 순한 눈을 가진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왜 그 아이에게 왜 ‘위기’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학교폭력도, 술 담배도, 왕따와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러나 A군은 일 년 사이 많은 일을 겪었다. 아버지가 공사 트럭을 운전하는 분이었는데 보조 운전하는 사람에게 살인을 당했다고 했다. 한동안 연락이 안 되는 상황에서 실종신고를 했고, 후에 경찰이 그 아이에게 좋지 않은 상태의 아버지 시신을 확인하게 되는 상황이 있었다. A군은 위기라기보다는 우울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와 이혼을 한 상태로 연락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생각보다 많은 빚을 남겼다. 그리고 너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모든 상황이 A군을 힘들게 했고, 청소년센터에서는 ‘위기’라는 이름으로 상담자인 나를 연결시켰다.
가정 먼저 진행한 것은 경제적인 상황에 도움이 되도록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언을 하고, 유산상속 포기를 통해 아버지의 빚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했다.
또한 현재 상황에서 A군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여동생과 함께 생활하는 부분은 친척의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함께 살거나 아니면 잠시지만 생활시설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어떨지를 의논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A군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찌 보면 가장 무겁고 제일 어려운 주제다.
나 역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제일 좋은지 늘 헤매고 있는데 어찌 감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타인의 삶에 조언을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만큼 고단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때 A군은 입시 중인 고3이었다. A군의 성향에 맞고 살면서 든든함이 돼줄 수 있는 직업이 뭔지를 생각했다. 직업이 전부는 아니지만 입시생인 A군의 목표로서 세워진다면 현재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의지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응급구조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A군에게 말했다.
“혹시 응급구조사를 들어본 적 있어?”
“잘 모르지만 소방관과 같은 거예요?”
“응, 소방관과 비슷한 건데 선생님은 A군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잘 모르는 부분도 많아. 하지만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과 A군이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내는 것이 참 대단하게 느껴지거든. 힘든 일을 겪은 A군이 훗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어.”
“제가 대단하게 느껴지세요?”
“응, 선생님은 진짜 A군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 A군과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선생님은 세상 원망하며 아마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을 거야. 힘든 나만 생각하며 여동생 생각은 전혀 못했을 거 같아.'
“선생님, 저는 여동생을 끝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살 생각이에요.”
“응, A군이 여동생을 부양하고 챙기고 싶은 마음과 앞에 말했던 이유까지 생각했을 때 소방관이라는 직업이 어떨까 싶었어. 응급구조사인 소방관 말이야. A군 같은 오빠가 있어 여동생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야.”
A군은 어느 대학, 어느 과로 가면 좋을지를 물었고, 해당되는 대학과 과를 알려주었다. 때는 지금과 같은 더운 여름, 인천의 한 어린이 놀이터였다. 일주일에 한 번, 8회 차의 상담이 끝나고 있었다.
상담은 끝이 났지만 A군은 나와의 마지막 만남을 잊지 않고 성적을 올려 결국 이야기 나눴던 대학의 응급구조과에 입학했다. 그 후에도 간혹 전화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곳에서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응급구조사 시험이 어려워 떨어질 것 같지만 꼭 붙고 싶다는 이야기. 마지막 소식은 군대를 간다는 소식이었다.
그 후 A군과는 연락이 끊겼지만 소방관들을 볼 때면 A군을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A군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쯤이면 아마 연차가 제법 쌓인 응급구조사가 되어 어느 소방서에서 멋진 소방관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서툴고 어리숙하지만 진심을 다했던 사회복지사의 마음으로 A군과 여동생이 잘 지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