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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뿔 Feb 01. 2022

종말론의 사랑

나는 차마 '사랑'을 떠올리지 못하고

미스터리한 예언이 가득한 2012년. 오래된 마야 문명의 역법이 마구 얽혀 모두가 말뿐인 멸망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주 종말론을 떠들어댔지만, 지구는 자신이 버텨온 46억 년을 자랑하듯 멀쩡했다. 아니지. 멀쩡하진 않았다. 애초에 지구의 멀쩡함은 '인류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조건'을 전제로 할 때 성립되는 형용사였다. 인류, 얼마나 우스운 단위인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도 갈등을 반복하는 존재가 인간인데, 당장 와닿지 않는 묵시록 같은 말로 어떻게 모든 사람의 뜻을 모을 수 있을까? 멸망은 인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사람들 틈새로 점점 파고들어 슬픈 불평등을 채워나갈 거다. 서서히 달궈지는 진실과 다르게 사람들이 원하는 멸망의 모습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단절되는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거대한 운석, 해일, 화산 폭발. 아무튼 커다란 무언가가 만들어낼 필멸의 미학이 인류를 압도하는 장엄한 연출. 지구가 사라진다는 것보다 인류가, 인류의 흔적이 부재한 지구를 떠올리는 게 더 두려울지 모른다.


아무튼 2012년의 나는 멸망을 바랐다. 인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을 묻어버릴 만큼 내 몸이 드러낸 슬픔은 깊었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온전히 이어지는 삶이 내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인류'라는 말에 의존하는 기후 재난 선언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쩔 수 없다'는 장벽 앞에 나는 끝없이 무력했다. 어떤 선택지도 없이 이미 결정 난 것들,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들, 예정된 멸망과 닮은 그것.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사소한 감정의 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의 열병이 몰고 온 무력감은 10년이 넘도록 내 머릿속을 붙잡고 있다. 열병을 더는 겪기 싫어 두려움의 형태로 빚고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마음이 피어날 때마다 그것을 지워내려 거칠게 닦아냈다. 이건 어느 만남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어떤 이의 삶 속으로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어느 시1)처럼 타인과 마주하고 그가 곁으로 다가와, 마음속까지 도달하는 순간은 모든 만남마다 조금씩 닮아있는 숭고한 과정이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 속에 녹아들기 어려운 존재가 있다. 어려운 존재가 겪는 어려움은 해결할 수 없는 아픔으로 쌓여 마음을 할퀸다.


'사랑' 흔하다 못해 지겨운 두 음절이 나를 괴롭혔다.

새는 듯한 숨소리로 입천장을 간지럽히고는 혀를 부드럽게 움직여 소리를 튕기고 다시 입 안에 꾹 눌러 담으면 사랑은 완성된다. 사랑은 숨과 혀로 상대에게 닿고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것이 사랑의 조건이다. 살결을 거치지 않아도 좋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와의 가벼운 대화에도 마냥 기뻐할 게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설렐 수 있음은 축복이다. 같은 공간에 스미는 타인의 숨결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단지 그뿐이라면, 멀리서 바라만 보다 다가서지 못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끝내 떠나야 할 운명이라면, 사랑스러운 당신의 숨결은 오히려 살을 에는 통증이다. 완연한 사춘기를 헤매던 내게 그 온화한 목소리, 말투, 미소, 손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랑'이 찾아온 순간 우주는 정지했고, 모든 물리 법칙을 초월한 아득한 감각―이 황홀감을 나는 '설렘'이라 곧잘 불렀다―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 찰나는 생생하게 그려져, 이따금 유월의 햇빛과 바람이 만든 온도와 습도, 냄새, 풍경으로 끌고 간다.

그날은 졸업 사진 촬영일이었다. 번호순으로 6명씩 조를 나누어 사진을 찍기로 하고, 너도나도 사진이 잘 나올만한 곳을 찾아 교정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볕이 비치는 소나무를 찾아냈다. 마침 아무도 자리를 잡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오른편에 전동휠체어를 세웠다. 렌즈를 바라봤다.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한 장 더"를 외치는 사진사의 열정이 뜨거운 초여름 볕에 겹쳐 볼이 살짝 붉어질 때쯤 촬영은 끝이 났다. 교실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오른손으로 휠체어 레버를 젖힐 때, 내 왼손에 누군가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같이 돌아가자."


‘같이.’ 이 말이 그리웠나 보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어도 결국 그 왁자함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만 한정되는 단편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학교 생활만을 같이할 수 있는 고립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뻗어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경험은 낯설면서도 설렜다. 그 시절의 소년과 소녀가 그러하듯이 주변의 뭇 아이들은 처음 겪는 사랑에 몸 둘 바를 몰랐고, 사랑은 어김없이 짓궂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밀려오는 낯선 감정을 미숙한 형태로나마 이해하려는 시도였을 거다. 먼저 사랑을 알아챈 그들을 보며, 내게도 ‘사랑’이 존재할지에 관한 의문을 품던 때였다. 몸이 만든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오래된 욕망과 ‘사랑’에 골몰하던 고뇌가 만나 일으킨 돌풍에 속절없이 휘말렸다. 3초.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 우주가 정지하고 빛이 피어났다.

얼떨떨했다. 나는 이 감각에 붙일 이름을 찾느라 무의미한 “어, 어어….”만을 반복했다. 이상했다. 갑자기 내 왼팔을 잡아끌며 같이 가자고 말하던 그 친구가 갑자기 내 시선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더 많은 사랑의 이유를 찾으려는 듯 자꾸 눈길이 갔다. 자칫 촌스러워 보이는 검정 뿔테 안경, 그 뒤로 비치던 얇은 쌍꺼풀을 가진 큰 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밝고 활기차게 장난치며 웃던 모습과 여러 친구를 챙기는 세심함. 그는 성격부터 사는 세상까지 온통 나와 달랐다. 처음부터 다른 종족으로 태어난 게 틀림없었다. 휠체어와 전동 침대 없이는 꿈쩍할 수 없고 그마저도 집과 학교를 나서면 힘겨워지는 ‘나’였으므로 그와 일상을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에게 일상의 동행은 불가능을 넘어선 ‘금지된 상상’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매주 수요일이면 활동지원사 분과 동네 장애인복지관에 마련된 목욕탕에 몸을 담았다. 목욕을 마치고 잠시 소파에 걸터앉았을 때, 옆에 놓인 거울을 봤다. 왠지 그날따라 비쩍 마른 몸 위로 도드라진 내 갈비뼈가 흉측해 보였다. 등 중간을 길게 가르는 큰 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휘어진 등뼈가 만들어낸 굴곡 가득한 내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느껴졌다. 말 그대로 ‘뒤틀린’ 형상이었다. 이런 존재가 감히 사랑을 꿈꿔도 될지 반문했다. 소중한 이와 일상 한 자리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몸뚱어리가 과연 자격이 있을까. 몇 발짝 떨어져 그가 가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불경스럽게 여겨졌다. 좁은 책상 틈도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없는 현실은 나와 그 사이의 거리를 무한하게 늘렸다. 물리적인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나에게 그것은 하나의 적색 편이처럼 다가왔다. 멀어지고, 멀어지고 또 멀어진다.

난 이 고된 외사랑을 몇 달 동안 앓다가 이만 단념하기로 했다. 모른 척하려 애썼다. 머지않아 우리는 졸업을 맞을 테고, 그러고 나면 영영 만날 수 없을 테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정된 이별이 가져온 슬픔을 졸업이 줄 아쉬움으로 덮어 씌우고서, ‘사랑’을 몰랐던 때로 되돌리고 싶었다. 꼭 그래야만 했다. 나는 내내 아팠으므로 더는 견디기 버거웠다.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면 행복했을 거라 되뇌며 스스로를 원망하다 이내 서러워졌다. 그를 사랑한 만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음이 괴로웠다. 차라리 그 계절에 세상이 모조리 사라지길 소망했다. 그런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다가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라며 지웠다 다시 떠올리기를 되풀이했다. 내 철없는 상상은 부질없고 이기적인 망상이었다. 적어도 난 그의 행복을 바랐어야 했다. 나는 비록 너로 인해 앓았으나, 너로 인해 사랑을 배워버렸으니 너는 더욱 사랑받으며 기쁘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소망하기로 했다.


12월 21일. 멸망이 예정된 겨울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대신 그보다 더 곤혹스러운 눈이 내렸다. 며칠 뒤는 방학, 졸업식은 1월. 이제 멀어질 수 있다는 다행스러운 슬픔이 속눈썹 끝에 맺혀 흘러내렸다. 나는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었다.2) 깊게 아팠지만 배농(排膿)은 끝마쳐야 한다.

졸업식날이 밝았다. 하루 전에는 눈이 왔었고, 교정에는 눈을 치운 하얀 흔적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눈이 녹듯 슬픔도 지워질 것이라 믿으며, 먼저 마음을 비운 덕―사실, 비우지 못했지만 비웠다고 억지로 믿었다―인지 식이 진행되는 내내 무덤덤했다. 그때는 여러 슬픔이 혈구처럼 내 몸속을 맴돌고 있었다. 사랑과 우정이 함께 붕괴되어 멀어질 미래와 이후에 따라올 완전한 낯섦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전에 쓴 글로 대신한다.

https://brunch.co.kr/@ossicone0309/4


이상했다. 슬프지 않아서 이상했다.

쌓인 슬픔이 풀리지 못해 마음 깊은 곳에 고여 눈물샘까지 막힌 모양새였다. 친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서둘러 학교를 나섰다. 당시 전동휠체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타고 갈 여건이 갖춰지지 못했다. 집에서 나오려면 반층을 내려와서 울퉁불퉁하게 포장된 인도를 넘고, 학교 앞의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기에 휠체어로 등교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학습 도움실에 휠체어를 놓아두고, 아침마다 실무사 선생님이 학교 현관으로 몰고 나오면 차에서 휠체어로 옮겨 태우는 방식을 택했다. 이 방식을 그대로 가져가기 위해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고등학교 건물로 휠체어를 옮겨야 했다. 장애인복지관의 리프트 차량을 빌려 휠체어를 옮겼다. 이전부터 리프트 차량을 이용하던 분과 시간대가 겹치는 바람에 서둘러야 했다.

바쁘게 몰아치는 일정에 떠밀려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조금 서먹한 사이였지만, 겹치는 친구가 많아 충분히 마지막 사진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인파 속에서 내 휠체어가 들어갈 틈은 없었고 다른 이들의 말소리로 북적거리는 공기는 내 목소리를 입모양만 남겼다. 그렇게 내 첫 외사랑은 막을 내렸다. 애석하게도 여기에 커튼콜은 없다. 나는 이 이후에 찾아올 사랑에 관해 말할 수 없었다. 어떤 형태로 사랑이 다가오더라도 두려울 것만 같았다. 그때와 닮은 마음이 생겨나기 전에 먼저 문을 닫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스스로를 사랑에게서 떨어뜨려 영원히 유폐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온 이후 학창 시절보다 휠체어로 다니기 편한 곳이 늘어나 친구들과 돌아다닐 기회는 늘었다. 물론 손을 잘 쓰지 못해 활동지원사 분이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밥을 먹지만, 그럴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밥을 먹는 내내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는 연인은 과연 충분히 매력적인 연인일 수 있는가. 음식을 먹으며 느껴지는 여러 감상을 나누기보다 어떻게 음식을 먹일지, 어떻게 화장실을 이용할지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면 소위 말하는 ‘로맨스’는 성립되지 않을 거다. 비장애인임을 전제로 하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능한 행위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을 것, 다시 말해 일 대 일로 이뤄지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만남이 충족되어야 로맨스는 생겨난다. 그런 의미에서 일 대 일이 아니라 활동지원사가 동행하는 연인과의 데이트는…. 상상만으로도 모두에게 불편한 자리다.

일상에 덧붙는 ‘돌봄’의 내용이 늘어갈수록 사랑에 관해 함구했다. 어릴 때보다 깊이 침투한 병증은 전동휠체어 레버를 젖히기도 힘겹게 만들고, 기온이 약간만 서늘해져도 금세 몸을 얼게 했다. 점차 내 의지로 가능한 영역을 잃어가는 과정 속에서 무서워졌다. 이건 일회적인 감정이 아닌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과 결합되어 나타난 짙은 두려움이었다. 내가 타인과 동등한 신체성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돌봄이 필요한 내 몸이 상대에게 어떤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돌봄 의존의 부채감’. 차라리 친구라면 이 부채감은 줄어들지만, 상대의 매력으로부터 찾아오는 묘한 긴장감이 필요한 연애 관계라면 비단 좋은 현상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돌봄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매력 없음’의 이미지와 이어졌는지 반추하면, 일상 전반에서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매력이 없는 요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심각한 동어반복이다. 당연히 모든 연애에서 돌봄은 이뤄진다. 연인이 아프거나 정서적인 지지가 필요할 때 해줄 수 있는 일들이 모두 ‘돌봄’이다. 그러나 이때의 돌봄은 아픔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는다는 확신이 있어 가능한 일시적인 내용이다. 다시 말해, 이전으로 되돌아올 수 있거나 적어도 자기 돌봄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돌봄이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진 돌봄은 사랑의 이유가 된다. 서로의 돌봄이 부족한 면면을 채워간다. 하지만 일방적인 돌봄이 필요한 신체는 사랑을 고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돌봄의 부담감과 의존의 부채감으로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파국적 결말을 맞을 것이다.

돌봄의 내용을 잔뜩 짊어진 채로 타인에게 연정(戀情)을 품는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어떤 신체에 필요한 돌봄을 알고 있거나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연애 상대로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지,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연애 관계로의 전환에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관계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흔한 연애 초반의 클리셰지만, 그 사람이 돌봄으로 맞닿는 관계망에서 사라질 때 일어날 공백의 압박은 너무나도 모질다. 이건 나를 이해하는, 정확하게는 돌봄의 내용을 아는 누군가가 지워진다는 상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도움을 위해 관계를 이용하는 이기적인 발상이지만, 상실의 두려움을 핑계 삼아 기존 관계 속에서 주어진 이해와 배려의 범위를 넘어서 감정을 갖게 되는 일이 싫었다. 더 가까워지고 깊어질수록 나는 짐이 되어, 이윽고 그들이 떠나갈 것 같았다. 관계의 변화가 가져올 불안도 마주할 수 없었다. ‘친구 이상’이라는 감정은 아무래도 감당할 수 없으니 존재해서는 안 됐다. 낯선 이와의 사랑은 더욱이 소망할 수 없다. 꼬리표처럼 늘어진 돌봄의 내용을 감출 수 없고, 그를 자세히 드러내는 일은 서로를 알아가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 친밀해지는 과정에서 떼놓을 수 없는 돌봄이 큰 무게로 다가오기에 갑작스러운 감정 앞에서 난처해진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이상하다. 연인과의 성애적인 사랑만이 아닌 가족과의 사랑, 반려동물과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신과의 사랑. 그리고 아직 언어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미묘한 거리의 사랑을 아우르는 모든 사랑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사랑으로 성숙되지 않는 사람은 타인과 살아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일 것이다. 그럼 반대로 사랑이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면, '성숙'의 기회가 불평등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사랑’과 ‘매력’, 그리고 ‘성숙’의 삼중주는 한 사람의 삶에 울림을 던진다. 나는 이 삼중주에 ‘돌봄’이라는 파트를 얹고 싶다. 과연 돌봄에 의존하면서도 성숙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은 ‘매력’의 전복 가능성을 함께 물어야 완성된다. 성애적인 사랑의 시작에서 '매력'을 빼놓을 수 없다. 돌봄의 부담이 남겨진 타인에게서 어떤 매력을 포착할 수 있는가. ‘돌봄’과 ‘매력’의 삐걱대는 관계는 서로를 무효로 만들어야만 종료되는 섬멸전인가. ‘매력’은 타인에게서 읽어내지 못한 미지수의 재발견으로부터 촉발하고, ‘돌봄’은 타인을 앎으로써 가능하다면 너무 많은 모습이 드러나 매력이 상실된 것은 아닌가. 물음만 빼곡하고 차마 답은 나오지 않는 아포리아(aporia)다.

‘성숙’에는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 익숙해진다’라는 의미가 있다. 사랑이 우리에게 내어줄 성숙이란, 자신에게 맞는, 익숙한 사랑의 결을 찾아가는 작업의 연속이다. 김원영 변호사가 주연으로 선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사랑과 우정에서” 언제나 차별적이다. 그것은 법과 제도로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구간이다. 사랑과 우정의 전제가 되는 어떤 매력을 우연찮게 다른 이에게서 발견한다면, 그 ‘매력’이 매력으로서 가치를 얻는 ‘매력성’의 조건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가. 연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연인이 가진 매력 지점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단순하게 외모일 수도 있고, 성격, 가치관, 지성,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비롯해 아마 다양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매력이 사랑의 무조건적인 출발점이라 말하기도 조금 어색하다. 어떤 매력은 사랑 이후에 알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후(事後)에 포착될 매력이 있다면 그것은 매력의 ‘발견’이라기보단 ‘발명’에 가깝다.

사랑-매력의 상호 서술 구조에서 ‘매력’이 발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동시에 ‘사랑’이 발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곡기를 끊겠다고 선언한 ‘너’를 위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다3)는 한 시인은 ‘너’에게서 매력을 읽어내기도 전에 이미 너를 사랑하겠다는 선언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조건 없이 함께할 사랑을 피워내는 용기는 어떤 마음인가. 그 마음은 서로 의존하는 기쁨에서 나타날 호혜성의 증거다. 여기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다른 이에게서 내가 받는 돌봄만큼 그들에게 베풀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다른 이에게 베푼 마음이 돌봄과 상응하는 가치가 있는지, 나아가 어떤 매력으로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삶 곳곳에 박힌 부채감은 내가 타인에게 어떤 것을 내놓더라도 늘 모자라거나 처음부터 줄 것이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 모자람의 감각. 내가 맺은 모든 관계의 가장 밑바탕에 숨긴 축축하게 그늘진 비밀 중 하나이다. 나는 아직 내 어두운 비밀을 꺼내고 싶지 않다. 평화로운 우정이 내 욕심으로 말미암아 깨지지 않길 희망한다. 이젠 그럴 나이도 못 되지만, 그저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고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낯선 타자와의 강렬한 사랑도, 익숙한 우정에서 태어날지도 모를 은근한 사랑도 나는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4)마는 존재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불안감이 먼저 나를 잡아끈다. 그럴 때마다 난 다시 뒷걸음질을 칠 거다. 사랑은 어떤 ‘잃음’을 조건으로 한다. 잃고 나면 분명 나는 쓸 것5)이다. 그건 사무치게 아프다.

겨우 외사랑을 소각하고 잿가루만 남았다고 우겨댈 무렵, 꿈을 꿨다. 깨고 나서도 설렘이 남은 아주 단꿈이었다. 천장에 난 창으로 찬란하게 부스러지는 무수한 별조각이 보이는 다락이었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 누군가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였고, 그 사람은 눈을 마주친 채로 말없이 미소 지으며 "나도."라고 대답했다. 꿈결의 여운은 길었고, 붙잡을 수 없는 그리움이 기뻐서 울고 말았다. 내겐 허락되지 않을 곳이 사랑―비장애 & 이성애/유성애 주체를 전제하는―에서의 정동을 확장하고, 매력을 전복함으로써 다르게 열릴 수 있다면, 그제야 아픔이 줄어들까. 사랑에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1) 정현종 시집 『섬』 중, <방문객>

2) 이은규 시집 『다정한 호칭』 중, <속눈썹의 효능>

3)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중, <사랑의 발명>

4) 정현우 에세이집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중, <그냥>

5) 혀가 쓰거나[苦], 글을 쓰겠지[書];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중, <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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