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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잘 쓰는 사람

by 카이

결혼 전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꽃을 선물한 적이 있다. 배달 업체를 통해 주문한 꽃바구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 꽃바구니를 받고 적잖이 실망했었다고 한다. 꽃바구니 속 카드에 적힌 삐뚤삐뚤한 글씨에 크게 실망했었다고…. 사실 그건 배달 업체에서 쓴 것인데 말이다.

글씨도 사람의 (첫) 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난 글씨를 잘 쓴다. 평소 자유로이 쓰는 글체만도 3~4 가지나 되고, 경조사에 참석하면 방명록에 큰 글씨로 이름을 적곤 흐뭇함에 미소 짓기도 한다. 아내 또한 글씨를 못 쓰는 편이 아님에도 남들에게 보여야 하는 글씨는 항상 내게 부탁할 정도이니, 혼자서 이만한 자화자찬은 귀엽게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내가 글씨를 잘 쓰게 된 계기는 부모님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글씨를 참 잘 쓰셨는데, 어머니는 평소 자식들에게 아버지를 존경한다거나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음에도 아버지의 필체만큼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그 덕에 난 항상 아버지와 비교되며 꾸중을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한 번은 온 정성과 노력을 들여 쓴 글씨를 어머니께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꿀밤 한 대였다. 그 순간이 얼마나 서운했었는지, 오기가 생겨났다.


그 사건 이후 미친 듯이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덕분에 지금은 그 누구도 내 글씨를 보고 꿀밤을 먹이지는 못 할 수준이 되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토록 자부심 높은 내 필체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며 내게 남기신 유일한 유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는 그동안의 많은 노력들이 기억 속에서 모두 다 잊히기 전에 어딘가에 잘 적어 정리해 두어야겠다.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주신 유일한 유산이라면,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신 유산을 고이 간직하여 손주들에게 전하는 것 또한, 평생을 고단하게 사신 아버지께 위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얼마 전부터는 「캘리그라피」라는 것도 시작했다. 글씨를 가지고 장난(?) 친 것이야 20년도 넘었으니 새로울 건 없지만, 이를 가지고 예술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건 내게 좀 충격이었나 보다. 한 자, 한 자에 혼을 담은 그런 글씨 말이다. 나도 언젠가 그런 글씨를 쓰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 10년쯤 후에 아이들에게 이리 말하리라.

“글씨 연습할 때는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할아버지처럼, 또 아빠처럼 멋진 글씨를 쓸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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