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작은 그랬다. 얼마 전 받은 조직검사의 결과를 며칠에 걸려 기다리다 알게 된 그날 밤.
양성이라 간단한 시술로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연락은 안도감과 함께 그럼에도 언제든 내가 아플 수도 있다 라는 사실이 특별한 이유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 양성이 아닌 암에 걸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마침 똑 떨어진 우유를 사기 위해 아이를 먼저 재우고 퇴근한 신랑을 기다렸다가 이어폰을 챙겨서 집을 나선 그날 밤.
늦은 시간 길거리를 혼자 걷는 것이 육아를 하면서혼자걷기가 낯설어진 나에게 얼마나 이상하면서도 소중한 시간인지 평소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만약에 내가 오늘 양성이 아닌 악성의 결과를 받았다면, 지금 길을 걷고 있는 이 시간이 내 건강의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면, 과연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어떤 마음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생각했을지…
“그림은 계속해서 그렸겠지? 생각이 너무 많아지고 복잡해져서 글을 다시 쓰게 되었을지도 몰라. 그림을 그리는 기력이 되지 않는다면, 사진이라도 찍게 될까? 아이는? 엄마가 온 우주인 내 귀여운 작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역시 친정집에 맡겨지고, 신랑은 계속해서 오히려 더 부담되는 경제활동을 이어가겠지? 항암치료가 힘들 텐데, 얼마 전까지도 내가 병원을 모시고 다녀야 했던 엄마가 이제는 날 병원에 데려다주게 되나? 엄마가 그 정도의 체력이 회복이 되었던가? 그래도 내 작은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있겠지? 그 정도의 체력은 지켜낼 수 있겠지? 아직 해보지 못한 내 작업들이야 잠깐 아쉬운 마음이지만, 내 작은 사람에게서 줄어들 엄마와의 시간은 너무나 미안해서 어쩌지?” 등등의 꼬리의 꼬리를 무는 끝이 없는 생각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봤어야 했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에 대해 나의 작은 사람에게 충분히 알려주고 얘기해 볼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막연하게 살아가며 조금씩 천천히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일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며칠간 겪은 일들은 그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명확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었고, 다른 것은 몰라도 나의 소중한 작은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그때그때 조금씩이라도 적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스물아홉에 만나 지금은 서른넷이 된 엄마가 다섯 살이 된 작은 사람에게 쓰는 편지들.
작은 사람이 자라면서 만나게 될 많은 일들 그리고 혹시나 작은 사람도 엄마가 되기 전이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조금씩 미리 알면 좋을 것들, 한 번쯤 생각해보며 살았음 하는 것들을 담아 쓰는 엄마의 편지.
그렇게 나의 작은 사람에게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