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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mdaDee Jan 07. 2023

졸업을 1년 남겨두고 갑자기 유치원교복이라니.

여섯 살 그리고 서른다섯의 12월

 엄마는 오늘 너를 등원시키다 만난 원장선생님과 유치원 문 앞에 서서 긴 대화를 나눴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에 원복 너무 이쁠 것 같지 않아요?' 하는 원장님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긴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지. 원래 유치원에서 이미 작년에 원복을 도입할까 하고 학부모에게 의견을 조사했었어. 과반수 이상의 학부모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었고, 엄마도 그 반대하는 의견 중에 한 명이었지.

 

 원복이라니! 무얼 입고가도 신나게 뛰어놀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는 너희들에게 원복. 그것도 원피스원복은 상상만 해도 답답해. 더군다나 스타킹 같이 압박이 있는 옷에 멀미를 느끼는 엄마를 닮은 너이기에 더 강하게 반대했었어. 어차피 나중에 원치 않아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6년 동안이나 입게 될 교복을 아직 뛰어노는 게 제일 좋은 너희 나이에 입는 게 엄마는 너무 갑갑해 보였어.

  엄마의 기억 속에 있는 추운 겨울 그 서늘한 블라우스의 느낌과 아무리 편하게 안에 챙겨 입어도 교복치마가 가지고 있는 불편함. 신축성 없는 원피스의 갑갑함. 행여나 체험학습을 가면 말 그대로 체험을 위해가는 건데 교복을 입고 차에서 안전벨트를 하고 있을 네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엄마는 멀미가 난다.


 원복을 했으면 하는 원장님이 내세운 장점은 소속감과 유치원 밖에서의 보호,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등의 내용이었어. 어느 유치원에 다니는지, 유치원에서 한 명 한 명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런 것들이 과연 같은 옷을 입는다고 느껴지는 부분일까? 엄마가 아는 소속감은 그렇게 복장하나만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  오히려 그렇게나 겉모습으로 함께인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진정한 함께를 느낄 수 없으면 그게 얼마나 더 외롭고 서글프게 하는지. 똑같아 보이는 것만으로 그런 혼자인 사람들에 대해 미처 발견하지 못하게 넘어가게 만드는 건 아닐지. 가장 나이 많은 형님이 7살인 너희들은 무엇을 입어도 입지 않아도 모두의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들을 몸으로 마음껏 배워야 하는 유일한 시기인데, 그런 너희들이 원복까지 입어가며 조심해야 할 할 행동이 뭐가 있었을까? 써 내려가면서도 느껴지는 이 갑갑함. 그래서 엄마는 작년에 원복추진이 무효가 되었을 때 가슴을 쓸어내렸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무산이 되었으니 네가 다니는 동안은 원복이야기가 또 나오지 않겠지 생각했어.


 그런데 웬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7살이 될 올해 다시 원복이야기가 나왔어. 심지어 이번엔 학부모전체의 의견조사 없이 운영위원회를 통해 결정이 됐다며, 원복을 하기로 확정되었다고 하더라. 원복안내문엔 어김없이 원복이 주는 소속감 책임감 자부심 등등의 장점 아닌 장점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구입을 희망하는지 않는지를 물어보는 선택지가 있었어. 물론 선택권을 주듯 마지막 한 줄에 원치 않으시면 구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쓰여있었지. 과연 유치원에 원복을 하기로 이미 확정했고, 원복에 대한 찬반이 아닌 구입여부에 대한 안내문에 나는 원복을 찬성하지 않으니 우리 아이는 사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학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학부모의 입장에서 원복에 반대하지만 결국 원복을 하지 않았을 때 원에서 원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느낄 소외감은 온전히 작은 내 아이의 몫인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선택은 내가 하지만 그 책임과 감정은 아이가 알아서 견뎌내야지' 라며 지켜볼 부모가 있을까? 혹시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원복을 구입하지 않게 될 아이들에 대한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었을까? 게다가 이미 아이들에게는 원복이 결정되기도 전에 강당에 전시된 새로운 옷, 예쁜 옷, 함께 입을 옷으로 홍보하며 갖게 된' 원복을 입고 싶다'는 아이들의 의견이 직접 원복을 입고 다니는 동안 차후에 겪게 될 수도 있는 불편함을 넘어설 만큼의 제대로 된 의견일까? 엄마가 가장 불편했던 점은 바로 그런 부분들이었어. 오늘도 엄마와 마주치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원복을 하게 돼서 다행히 이예요. 원복 너무 이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원장님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지며 시작된 대화였지.  차라리 원장님이 '그간 원복이 있는 유치원을 운영하고 싶었다'라고 말씀하셨으면 '아, 네' 하고 그냥 넘기게 되었을까? 엄마는 속으로만 '이럴 거면 입학할 때부터 정하시고 원복이 있는 유치원을 다닐지 말지의 선택권을 주시지 이제 와서 또 이렇게 결국 원복을 고집하실 만큼이나 하고 싶으셨나 보네요' 생각하고 말았을까?


 등원길에 그렇게 시작된 원장님과의 긴 대화 중에 원장님은 끊임없이 원복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엄마에게 원복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셨어. 원복을 전체에게 묻지 않았지만 학부모운영위원회의를 통해 결정했다는 명분과 함께 '원복을 입으면 서울의 좋은 명문유치원 같아서 좋아하는 어머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작년에는 반대하는 어머님들이 많아서 못했는데, 이번에는 운영위원회의에서만 결정해서 드디어 원복을 입게 돼서 너무 좋네요'라는 원장님의 말에 엄마는 '아 내가 유치원을 결정할 때 뭔가 잘못선택해도 한참 잘못 선택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서 뜨악했단다. 원복이 그렇게 하고 싶으셨으면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부터 정식으로 입학설명회 때 공지도 해서 진행하시면 되지 않냐는 질문에는 '그럼 입히고 싶은 기존 학부모님들이 난리이실걸요?' 하시는데, 아니 그럼 기존에 재학 중에 원복을 입히고 싶지 않은 학부모들 의견은요? 하고 되물었지만, 아이들이 너무 입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만 돌아올 뿐이었어. 원장님과의 대화가 끝이 날수록 이제 1년밖에 남지 않은, 잘 다니고 있던 유치원을 옮겨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 이제 1년밖에 남지 않은 유치원을 옮긴다는 건 생각보다 상상하는 것보다 큰 일이거든? 무엇보다 환경의 변화에서 감당해야 할 사람은 온전히 나의 소중한 작은 사람인 네 몫이다 보니 평소 엄마만의 문제에선 고민할 가치도 없던 것들 까지도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한단다. 그렇게 원을 옮겨야 하는 건가 하는 거대한 찝찝함만 남은 어마무시한 대화가 끝났고 집에 오는 엄마의 발걸음은 아주 무거웠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역시 엄마는 아직 고민 중이야.

너에게 직접적인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무엇보다 옮길 유치원에 대한 대안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원을 옮길 만큼의 중대한 사안인가? 엄마 생각엔 단순히 원복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유치원에서의 큰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오는 원장님에 대한 신뢰도와 네가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총책임자인 원장님과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불편감이 단순히 엄마와 결이 다른 사람에서 오는 불편감인지, 전반적인 유치원의 교육관과 연결된 중대한 불편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막연한 엄마의 감으로는 후자인 것 같아서 원을 옮겨야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대화 중에 생겨난 것 같지만 말이지.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엄마가 느끼는 불편감이나 신뢰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국 유치원에서 배우고 자라나고 생활하는 네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더 망설이게 되기도 하고 말이야. 새로운 어디를 가도 잘 적응하고 똑 부러지게 생활할 너란 걸 알지만, 또 익숙한 것에서 오는 너의 평안함을 엄마의 욕심으로 좌지우지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게 해. 또는 반대로 엄마가 느낀 불편감에서 오는 기시감을 애써 평안함과 변화의 두려움으로 인해 구석으로 그냥 미루었다가 나중에 가서 결국엔 그 불편감이 맞았구나 하는 후회를 하게 될까 봐. 이미 그때엔 네게 그 불편감들로부터 만들어진 불미스러운 일들을 겪게 하는 건 아닐지...


 그게 참 그렇다. 엄마만의 문제들에선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했던 부분들이 엄마에게 있어서 신념과도 같은 것들인데, 평생이 가도 흔들릴 일 없을 거라 자신하던 것들인데 말이지. 나의 작은 사람, 너에 관련해선 열 번이고 백번이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심하게 해. 아마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너와 관련되어서 이기도 하고 결코 엄마가 함부로 동일시할 수 없는 결국엔 타인인 네가 결과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아. 아무리 엄마의 뱃속에서 함께하고, 낳고, 엄마가 너의 우주가 되어 너를 키우고 있지만, 그래도 너와 엄마가 동일시되어선 안되니까. 그래도 엄마는 알고 있어. 어떤 일이 생겨도 어떤 상황에서도 넌 엄마보다 더 강하고 행여나 힘든 일들이 있더라도 언제나 네 곁에는 엄마와 아빠가 있을 거라는 것 말이야.


 이 글을 읽을 만큼 자란 너는 지금의 엄마의 고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정말 궁금하다.

어떤 생각들과 가치관을 가지고 자라나게 키웠을지. 아니다 부모가 키우는 건 맞지만 생각과 가치관들이 자라나고 그것들을 가지치기해서 굳건해지는 건 온전히 아이 몫인 것 같다. 부모는 가치관이 자라날 흙과 따뜻한 햇볕과 물 그리고 새싹을 틔워주는 것뿐. 네 스스로 멋진 나무로 자라나는 것 같아.

 나중에 네 나무가 엄마 나무만큼 자라고 엄마를 지나 엄마보다 더 큰 나무가 되었을 날이 기대된다.

그리고 너와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할 날이 기다려진다. 미래의 너와 지금 당장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엄마의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말이지.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으니 엄마가 조금 더 열심히 생각해 볼게. 기나긴 이번 글을 쓰고 나니 새근새근 잠들어있을 평안 그 자체인 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 졌어. 얼른 마무리하고 네 옆으로 갈게.



잘 자고 우리 또 만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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