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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mdaDee Jul 23. 2020

집안일이란 무엇인가?

작업일지 번외편 하나

매일매일 차곡차고 자리 잡고 있는 수건들.

빨래통에 넣어두면 다시 말끔해져서는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옷가지들.

때가 되면 차려진 밥을 먹고 할 일들을 하다가 잠드는 일상들.


그 일상들이 당연하던 때가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해야 할 몫의 하나였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것도 해야 할 몫이었으나 내가 해야 할 일에 속하지 않은 것 하나, 바로 집안일.

그때의 내 핑계는 그랬던 것 같다. 집에 있는 사람이 집안일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밖에서 학교도 다녀야 하고, 알바도 해야 하고, 잡다한 약속들까지 오히려 잠잘 시간 빼고는 부족한 나날들 속에 집안일은 집안에 있는 사람의 일이었다. 어쩌다 쉬는 주말에는 말 그대로 쉬어야 하는 날들. 그 쉬는 날들 조차도 계속되는 끼니와 집안일은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의 엄마의 잔소리는 말 그대로 잔소리. 언니와 설거지를 번갈아 하는 것조차 날을 새우고 이번엔 네 차례 내 차례 하며 벼슬이라도 되느냐 따지게 되었다. 어쩌다가 엄마가 일정이 있는 날에는 큰 맘을 먹고 대청소를 해두고는 부렸던 생색. 말 그대로 엄마의 일을 내가 도와준 것. 대신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마주한 집안일.

나도 일을 하고 있었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서 당연시되던 내 몫의 집안일들.

남편은 종종 스스로가 가정적이 남편이라며 그 점을 꾀나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했었다.

실제로 가정적인 편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아내의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남편이었지 집안일에 일정부분 책임을 갖는 쪽은 아니었다. 그 말인즉 집안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 나를 어딘가 모르게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안겨주었고 이제와 생각해보건대 그건 아마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맞춰가는 과정이라 생각했고, 역시나 집에 있는 시간이 내가 더 많으니 내가 좀 더 할애를 하겠다 생각하고 넘겼다.

 그렇게 넘긴 것들은 아이가 생기고 내가 해야 할 몫에 육아가 더해지는 순간 곱절이 되어 드러났다.

육아에 관하여는 집안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치 한번도 본적없는 수학의 정석을 펼치는 느낌이라 가사노동에대해 쓰고 있는 이글에서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아무튼 그렇게 육아만으로도 버거웠던 날들에 집안일들은 정말 키만큼 쌓여있는 숙제 같은 것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면서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육아와 집안일은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청소는 고사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그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엄마"라는 대명사만 남은 내 일상은 매일같이 날카롭고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날들이었다. 아이가 자라고 어린이집에 다니게 될때즘에서야 숨통이 겨우 틔였고 혼자 있을 수 있는 4-5시간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얼마나 설레었는지... 그 시간을 겨우 집안일에 할애하고 아이가 오면 또다시 쉬는 시간 없고 퇴근 없는 육아가 시작되고 분명 시간이 생겼지만 여전히 내 이름은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내 생각들을 만들어내어 표현하던 작업을 하며 살아오던 나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끝까지 차올랐고, 정말 어느 한순간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모든 것이 폭발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엔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시간을 써야겠다고. 집안일들은 좀 내려두고 혼자 있는 시간에만 할 수 있는 내 작업을 하고, 글을 쓰고, 아이가 돌아오면 함께 보며 집안일을 해야겠다고.

 그제야 아주 조금 내 이름을 찾은 것 같고 숨이 쉬어지는 듯했다. 집안일에 소홀해지는 부분에 대한 쓴소리는 가볍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좀 억울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이렇게나 처절하게 쟁취해야 하는 것일까. 평생을 내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던 그 마음들이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엄마로서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다지도 결연할 일인지.

 그 와중에 바깥일을 하고 있는 남편 또한 여유 있는 자기 시간이 없다는 건 알고있지만 일단 내가 살고 볼일이었다. 엄마로만 불리는 내 일상은 혼자 화장실에 갈 여유조차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호화롭게 내 작업을 할 수 있을 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부분도 챙겨야 내 시간을 나 혼자 오롯이 쓰는데에 대한 죄책감을 좀 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일단은 그리고 싶었던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중 아이가 돌이 지나도록 그려주지 못한 돌사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졌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내 강아지 하나, 그리고 엄마 집에 있는 남은 이이들과 함께 돌상을 꾸미고 한자리에 있는 시간을 그림으로 그려서라도 간직하고 싶었다. 육아만으로도 힘들던 시간 하나를 잃은 슬픔마저도 사치였던 그날들에 대한 후회가 꼭 그려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무지개다리를 건넌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처럼 함께 할 수 없는 그리움들을 담아주는 그림을 그려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개념 정도의 경제적 수입이지만,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받고 필요로 함을 느끼는 건 그 이상이다. 그 가치들은 차곡차곡 쌓여 내 이름을 조금씩 찾아주었고 사라졌던 자존감을 만들어주었으며 그것들을 모아 이제는 내 작업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욕심나는 작업시간. 그리고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한정된 시간의 분배. 무엇보다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오롯이 내 몫인 것 같아 생겨나는 집안일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부당함.

 적어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생겨나는 집안일의 어느 정도는 함께여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전형적인 난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거슬리는 이건 네 일이니 내가 도와주면 감사해야 하고 손하나 까딱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당하다는 마인드. 스스로 가정적이라 생각하지만 어디까지 잘 도와주는 것이지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반문하게 된다. 육아는? 엄마와 아빠 각각의 책임이 분명한 와중에 아이가 엄마만 따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내 몫이 돼버린 육아. 한발 양보해서 아이의 선택이니 육아에 전념한다 한들 그렇다면 가사노동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제약이 없는 부분인데 함께 해야 할 일 아닌가. 경제적인 책임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서 가사노동에 면죄부를 준 적은 없는데. 특히나 함께 쉬는 주말에 평일에 일했으니 나는 쉬겠다는 퇴근도 없고 주말도 없는 끊임없는 가사노동은 누가 한단 말인가. 어디 육아는 쉬는 시간이 있던가. 이런 끊임없는 물음들은 특히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같은 주말에 간절해진다.

 내가 이렇게 평일을 사랑하고, 주말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라게 될지 예상이나 했을까? 글쓰기를 하는 동안 싸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화장실 청소를 해놓은 남편의 촉에 그나마 감사하며 얼마 안 남은 일요일 저녁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작업의 시간으로 몰입하기 위해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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