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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mdaDee Jul 24. 2020

2.빈 캔버스

여섯 번째 작업일지_그림을 조각하는 방법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빈 캔버스.

작업 자체를 시작하기까지의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난 후 마주한 빈 캔버스는 얼마나 설레는지 모른다.

어떤 재료로 그릴지 무엇을 그릴지 사이즈는 어떻게 할지 등의 부수적인 고민과 선택들이 끝나고 비로소 작업의 시작점인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광활한 눈밭을 마주할 때만큼이나 흥분된다.


 모든 것은 준비되어있고 내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바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순간.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육아에 살림에 치여 보내던 일상 중에 어떻게든 나를 붙들고 있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준비한 작업의 시간을 드디어 마주했다.


 아무것도 그려있지 않은 시작의 캔버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벌써 꽤 괜찮은 작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물론  순백이 상태에 내 움직임을 시작으로 무언가가 그려지는 게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 두려움이 어떠한 마음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간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들로 가득 차오르던 나로서는 손을 가만히 둘 수 없는 간질간질한 설렘이 너무나 커서 롤러코스터가 출발하기 직전의 흥분되는 즐거움이 두려움을 잊어버리게 한다.




 나는 작업을 하는 방법 자체가 흔히들 말하는 문과 이과에서 다분히 이과적인 사람이다.

(실제로 이과였다. 예체능은 일반적으로 문과로 입시를 치루지만 나는 아무리 봐도 미술작업은 이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들이 영감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예술적인 감성들이 드러나겠지만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는 다분히 이성적인 것들이 필요로 한다.  아마도 전공했던 조소자체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입체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요하는 재료연구나 기술적인 부분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성이 흐르는 대로가 아닌 철저하게 실험과 기술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에 그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림도 어떤 그림을 그리겠다 하는 영감이 떠오른 순간만 감성적일 뿐 허구인 영감이 머릿속을 나와 실제로 실현이 되는 순간부터는 이과적인 움직임들로 분주하다. 감성적인 붓터치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시간들이 더 어울린다.

실제로도 노동에 가까운 인고의 시간이 지나야 만 하나의 작업이 나온다.  이번 작업 같은 경우는 그런 나의 성향이 정말로 두드러지는 작업이다. 작업 시간을 쪼개어 쓰다 보니 잠깐씩이라도 빠르게 집중하고 작업할 수 있도록 화면을 조각내어 그리는 방식이다 보니 준비과정이 조금 더 그러했다.


 하나의 작은 조각의 방을 그려서 커다란 화면을 만들어내는 이번 작업은 순간순간 내가 숨어들어 그린 작은 조각의 방들이 모여서 누군가에게 일상 속에서 바라보며 숨 쉴 수 있는 숨어있기 좋은 방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화면을 조각내는 과정에서도 역시 화면의 크기를 재고 그릴 대상의 크기를 재고 조각을 내고 구부을 하고 그 과정 속에서 필요한 건 정확한 수학적인 계산. 그리고 컴퓨터로 그린듯한 정확한 분할을 필요로 했다. 가끔 작업을 하다 보면 다수의 실험을 거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실험실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번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그려본 에스키스 한 조각 1
이번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그려본 에스키스 한 조각 2




 캔버스에 그리기 전 실제에 가깝게 에스키스를 그려보곤 하는데(캔버스는 소중하니까요) 그 에스키스에서 완성된 작업의 전반적인 느낌을 예측한 후 실제 작업에 들어간다.  첫 번째 조각은 건식 재료의 에스키스 두 번째 조각은 반습식 재료의 에스키스. 두 조각의 느낌이 너무나 달라서 선택에 고민이 좀 있었지만 생각했던 작업의 구상과는 두 번째 조각이 더 가까워서 두 번째 재료로 진행하기로 한다.


 이제 정말 모든 준비가 되었으니, 빈 캔버스에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을 시작해야겠다.

[그림을 조각하는 방법] 매거진에 조금씩 그려진 숨어있기 좋은 방의 조각들을 하나둘 사진으로 올리고 글을 쓰며 작업을 기록할 예정이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씩 채워가는 부지런한 노동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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