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정적인 경험을 겪고 나면 위축되게 마련이다. 나도 단지 그것뿐인 걸까. 예전에도 적었지만, 아내는 나를 부정적인 사람으로 보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상당히 냉정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정적으로 사고했다기보다는 실제로 세상이든, 상황이든, 미래든, 나의 현실이든 좋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무조건 내가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도 아무런 근거 없이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내 삶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도 참 별난 놈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는데, 나는 워낙 예민한 성격이다 보니 결혼할 때도 아내보다 내가 결혼 전 우울증(메리지블루)이 훨씬 심했다. 그때의 나는 '결혼, 깨질려면 깨지라지 뭐' 약간 이 정도의 태도에 가까웠던 것 같다. 동갑내기 여자사람친구가 있는데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내가 나와 어떻게든 결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참고 견딘 것이라는 말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결혼이라는 삶에서 다시 경험하기 힘들(물론 난 이후에 훨씬 더 힘든 상황도 경험하게 되었지만) 큰 사건을 앞두고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던 점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그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아내와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백 번 다 다시 결혼할 것 같은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생각까지는 별로 하지 않았던 터여서 그때(결혼적령기)쯤에나 만날 수 있는 운명의 상대를 놓친 건 아닐까 하는 해괴망측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또 어느 정도의 나이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내 주변에 있는 여자사람친구들을 다시 한번씩 되돌아 보게 되었었다. '이때까지도 결혼하지 못한다면 얘랑 결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망상도 꽤 했었는데, 실제로도 그런 경우를 목격하기도 했던 데다가 나 정도면 그래도 결혼시장에서 '무난한 사람'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건, 그건 거의 10년 전 이야기라는 점이다.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면 이렇게 한 번 파경을 겪고 나니 그때 했던 생각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물론 사람의 삶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을 돌이켜보았을 때 그런 생각으로 결혼해서는 결코 행복하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결혼이란 관계의 문제이니 나와 결혼한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 달랐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척 불편했을 해프닝을 겪으면서 나에 대해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는 도저히 청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마흔둘의 중년인 데다가 결혼도 한 번 했고, 형사법적인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내 성격을 이기지 못해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외모가 특출나거나 키가 엄청 크다거나 아니면 몸이 엄청 좋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저그런 직장에 다니고 그저 평범한 정도의 자산을 모아 놓았을 뿐인 한낱 중년 남성이었다. 가장 큰 건 한 번 다녀왔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고.
물론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위로를 해 주고 나 또한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어떤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만큼 또 우리는 과학적인(?) 확률도 계산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따지면 걷고 있는 내 머리 바로 위로 운석이 떨어져 내가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인생에 그렇게 무슨 일이든 생겨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다시 기적 같은 인연이 찾아올 수도 있고, 지금의 힘든 시간을 보상받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지.
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한 번은 예전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서 내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세상에 여자가 아내 한 명뿐이냐고, 다시 또 좋은 인연을 만나실 수도 있는 거고 뭐 그런 류의 말씀을 하셨던 적도 있다. 그때 내가 엉엉 울면서 그때도 이성적으로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던 것 같다. 선생님도 아시지 않느냐고. 우리가 20, 30대 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40대가 된 지금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아예 다르다고. 솔직히 말해서 거의 힘들지 않냐고.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께서도 객관적으로 훨씬 기회가 적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나를 위로해 주셨던 생각이 난다.
지난 한 해(이제는 뭐 그냥 한 해라고 해도 되겠지)를 보내면서 인간적으로는 내가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낀다. 어제 상담을 받으면서 상담사 선생님께서 사람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아니라고, 나는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거치면서 사람이 정말 많이 변했다고 말씀드렸다. 당장 예전의 감정적이고 즉각적이고 직설적으로 반응하던 부분이 많이 사라졌다. 아내에게 그 지점을 많이 지적받기도 했고, 그렇게 행동했다가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나는 엄청난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웃음) 다른 것도 많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나는 결혼하기 전의 나보다 7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인격적으로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스물보다는 서른이, 서른보다는 마흔이, 환갑보단 칠순인 사람을 만나는 게 더 나은가. 물론 꼭 나이와 사람의 성숙도가 비례하지는 않지만 같은 사람일 경우 나이가 들면 조금 더 성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스무 살의 누구를 만나기보다는 그 사람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만나길 바라고, 서른 살보다는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만난다면 좀 더 나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럼 나도 당장 어느 할머니를 만난다면 훨씬 더 배울 것도 많고 깨우칠 것도 많고, 내게도 따뜻하게 잘 대해 주시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간적으로 성숙한 백 세의 어르신을 만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인간적으로는 예전보다 더 성숙해졌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호적에 적힌 큰 상처를 입었고, 주름도 늘었으며 더 이상 예전처럼 피부가 하얗지도 않고, 체력도 예전만 못할 뿐만 아니라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 아마 키도 몇 mm 정도는 줄지 않았을까. 사람이 외형만이 다가 아니라지만 어쨌든 성숙함을 얻은 만큼 잃은 것도 있다는 이야기다.
브런치에 그 글이 있는지 없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부끄럽게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상대도 언젠가는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비뚤어진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이건 경험 때문에 그렇게 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마흔을 넘은 지금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제 그런 왜곡된 사고관을 가지고 있진 않고, 나이에 걸맞게 갖추어야 하는 예의나 겸양 이런 것에 대해 항상 고민하며, 꼰대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한다고 늘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48시간의 해프닝은 딱 그 정도 선에서 끝났고, 일요일에 성가대에서도 그 친구와 마주쳤다.(어색함은 있었다.)
원래부터 그 친구와 아무 사이도 아니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이럴 때 쉽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이도 많고, 위에 적은 단점들을 다시 적기에는 슬퍼서 그만 이야기하기로 하고, 결정적으로 한 번 다녀왔다는 약점도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 떳떳하게 다가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기도 한 것 같다.
매일같이 생각한다. 나는 정말 외로움이 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휴일에도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다. 국군의날에는 친구와 근교로 여행을 다녀왔고, 한글날에는 등산을 간다. 굳이 그렇게 애써서 약속을 만들지 않아도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아직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에는 나 스스로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야겠지만 그것은 참 쉽지 않고 그래서 난 여전히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꿈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꿈(dream)이겠지. 달성할 수 있는 목표(goal)가 아니라.
사람들은 내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선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결론도 이게 아니고, 내가 바라는 바도 이게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게 맞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