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모(母)회사의 직원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모회사 직원이 'honest님은 인정욕구가 엄청 강하신 분이구나'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터진 회사에 대한 불평 속에서, 회사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내가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만도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뭐, 짧은 대화에서 '아니거든요?' 이렇게 일일이 반복할 것까진 못 되고, 별일없이 대화를 잘 이어 가다가 헤어지고 난 다음부터 한 번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정말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인가.
인정욕구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소심하고 내향적인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걸 싫다고 할리는 없다. 물론 그런 성향의 사람이라면 공개적으로 칭찬받고 인정받을 때는 조금 곤란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인정을 표현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이지, 인정 자체에 대한 불만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내성적인 사람이 있다면 따로 불러서, 조용히 인정해 준다면 그 사람도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왜 날 인정해 주지?' 이렇게 생각할 리가. 내가 세상 모든 사람을 다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한 번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말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딱히 그렇게 의식하고 살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돌아보면 나는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인정' 자체를 당연히 여기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학창시절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진 학교에서 당연하게 인정받았고(성적으로 평가하는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이 인정받지 못할 리 만무하니),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교수님들께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군대에 갔더니 어땠나. 훈련소에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서 살면서 처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기를 겪었던 것 같지만, 막상 부대에 배치된 뒤로는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장교로 시간을 보냈다.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를 떠올려 본다. 연수기간 중에 본부장이 잠깐 신입사원 격려차 들린다고 했더니 인사팀의 교육담당자들이 급히 나를 찾았다. 본부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거였다.(그러고 보니 인정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헤드테이블에 앉으면 먹기 불편하다고 싫다고 하는 동기도 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30년 동안 내 삶에 인정이 없는 순간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내 삶에 거의 모든 교육자에 대한 기억이 좋은 편인데 유일하게 가장 결정적인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만은 별로 좋지 않은데, 그건 내가 선생님께 1순위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 크게 상관없었다. 난 이미 학교에서 인정받는 학생이었으니. 그랬던 삶이 서른 이후로는 많이 달라졌다. 크게 인정받을 일도 별로 없었고, 실제로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회사와 이런저런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 회사에서도 대체로 내 업무능력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는 편이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런데 뭐 난 딱히 그걸 바란 적은 없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 스스로도 그렇게 자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 맞는 보상도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게 나와 회사 사이에 생기는 문제의 시발점이다.
한때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힘든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별로 그렇지 않다. 그냥 일은 대우해 주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몸도 편해졌고. 특히 그렇게까지 되는 과정에서 회사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까닭에 회사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직원이 되어 더 좋아진 셈도 있다.
학창 시절, 세상을 산다는 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건 결국 낙오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모든 반에 시험 때마다 올백(All 100)을 맞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한 번도 반에서 1등을 하지 못했고, 그게 어린 나이에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많았던 올백 학생들이 2학년이 되면 다 사라진다. 2학년 때부터는 올백을 받은 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1학년 때 올백을 받았던 학생들도 2학년이 되면 점차 성적이 들쭉날쭉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처음엔 선두권에 정말 많은 학생들이 속해 있지만, 마치 마라톤 경기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면,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 서서히 낙오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선두권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도시에는 초등학교가 10개 정도 있었던 것 같고, 1학년 때 올백을 맞는 학생들은 도시 전체를 합하면 수십 명도 넘고, 나처럼 올백이 안 되는 학생까지 하면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 같은데, 정작 대학 진학 때 SKY에 갈 수 있는 학생들을 꼽아 보면 고작 2, 30명에 그친다. 마라톤처럼 그 사이에 수많은 학생들이 매해, 조금씩 낙오하고 있었던 셈이다.
슬프지만 내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서른 살 때까지는 어떻게 저떻게 버티고 버텼지만 나도 결국 마라톤 경주에서 30km를 넘으면서부터는 선두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때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선두권을 바라보며 죽어라 달리려고도 해 보았지만, 이제는 어느 순간 격차는 너무 벌어졌고, 그냥 이 정도로 중간 정도에서 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도 느끼게 됐다. 물론 선두권에서 뛰었으면 하는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욕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태어났을 때부터 인정만 받고 살아 온 사람인데. 그러나 놓아야 할 때는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된 게 40년 인생의 관록(?) 아닌가 생각한다.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냐고요? 아니요. 인정욕구는 누구나 다 강합니다. 저만 특별한 건 아니고요. 그리고 저는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늘 인정받고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이에요. 이제는 점점 그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아 가는 중이고요. 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