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으면 어디로든 놀러 가고 싶다. 첫째 아이가 어릴 땐 봄이나 가을이면 동물원을 찾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도 그러했다. 언제부터인가 동물원이 마음 불편한 곳이 되었다. 그 안에 갇혀있는 동물들을 그저 웃으며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저들은 행복할까? 답답하지는 않을까? 갇혀있는 동물들을 보며 우리는 신기해하고 기뻐해야 하는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기어가는 개미가 밟힐까 총총걸음을 걷는 아이들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태어난다 생각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무엇과 마주하기에, 창살에 갇힌 그들을 보며 즐기게 되는 걸까.
동물들을 보호한다는 이유 아래 또는 그 외의 다양한 이유로 동물원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 본질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 작은 동물카페들이 날로 새로이 생겨나고 있다. 자연을 알아간다는 건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가둬두고 만져보며 즐기는 유희의 대상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던 동물이 인위적인 기후와 환경에서 갇혀 지낸다는 건 쉽지않은 일일 터. 그들이 정말 귀여운가, 그들이 정말 똑똑한가, 그들이 정말 박수를 받을 만하가.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함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행동하는 것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먹고, 입고, 만들고, 경쟁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해치며 살아가는 동안 ‘그냥’이 아닌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관계, 소중함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고귀한 생명 하나하나의 숨결이 모여 인류라는 공동체 나아가 지구, 더 나아가 우주를 이룬다. 그 안에 내가 존재하고, 당신이 존재한다. 다르지 않다. 그것이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동물원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 걸까?
꼭 필요하기는 한 걸까?
다큐 ⌜휴머니멀⌟을 보며
‘트로피 헌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트로피 헌팅이란,
단순히 오락이나 전시를 위해 사자나 코뿔소 등의
대형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트로피 헌터들은
거액의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이 행위를 즐깁니다.
멸종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고귀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동물의 삶을 계속 기념해 주기 위해…
그들은 그들만의 정당함을 내세웁니다.
그들의 행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