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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지 Aug 21. 2021

소녀와 무한도전

 MBC '놀면 뭐하니'에서 오랜만에 무한도전 멤버들이 출연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들뜬 마음으로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설레었다.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고작 티비 프로그램 하나에 나는 왜 이리 설레며 방송 시각을 손꼽아 기다리는가. 순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티비쇼의 장면들과 함께 나의 철없던 이십 대 시절이 겹쳐 머릿속을 지나갔다.




 가난한 대학 신입생의 자취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전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는 아니었으나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들만 있었다. 냉장고, 밥통, 베개와 이불. 그 외에는 대학 새내기의 마음을 달랠 다른 물건들은 없었다. 하루는 내 자취방에 대학 선배들이 방문했고,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내 방을 둘러보며 깜짝 놀랐다. 2000년대 중반이던 그 시절,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라면 노트북 한 대 쯤은 들고 올라오던 시기였다.
"여기는 티비도 없어?"
"컴퓨터도 없으면 레포트는 어떻게 써?"

 당시 우리 집은 국립대 입학금과 등록금도 학자금 대출로 겨우 마련한 처지였기에 철부지 막내딸을 위해 별도의 컴퓨터 한 대를 사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대학 동기들이 자신의 노트북과 데스크탑으로 레포트를 쓸 때 나는 대학교 멀티미디어실의 공용 컴퓨터로 레포트를 썼다. 친구들이 노트북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다운 받아볼 때 나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잔뜩 빌려다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등 일본 소설에 심취하여 일본문학 책장의 책들을 다 읽을 기세였다. 어느 날 놀러 간 친구의 방에서는 노트북으로 재생한 SG워너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시골에서 가져온 CD플레이어로 중고등학교 때부터 모아 온 가수들의 흘러간 노래를 들었다. 토이와 패닉, 이승환의 노래는 최신 유행곡은 아니었지만 들어도 들어도 아름다웠다.

 티비와 컴퓨터가 없는 무료함은 대체로 잘 달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나 보고 싶은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무한도전'이었다. 주전자와 쟁반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을 달리고, 유명한 축구 선수와 물공 헤딩을 하는 황당한 프로그램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시골집에 내려가는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티비 앞에 모여 앉아 무한도전을 봤다. 대학 신입생이던 나도, 오십을 향해 달려가던 우리 부모님도 깔깔대며 웃었다. 그 때의 나도, 부모님도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고 젊었는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딸은 부모님 앞에서 조잘조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사려 깊은 부모님도 딸의 대학 생활을 코치코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티비 앞에 모여 방송을 보고 웃음을 나누었다. 그게 당시 우리가 무언가를 공유하는 방법이었다.

 폭풍 같던 대학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방학 때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첫 컴퓨터를 장만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도 집에서 레포트를 쓰고, 영화와 티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니터에 바탕화면을 띄워 놓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가장 보고 싶었던 무한도전 영상을 다운 받아 하루 종일 보고 또 보았다. 밥 먹을 때도 보고 심심할 때도 보고 간식을 먹을 때도 보고... 그렇게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무한도전은 나의 휴식이었고, 위안이었고, 친구였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후에도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무한도전을 보았다. 겨우 마련한 이름 없는 회사의 컴퓨터에서 이제는 대기업의 65인치 티비로 시청하는 수단이 바뀌었지만, 설레며 티비를 보는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시절의 소녀가 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오래 계속되길 바라던 무한도전은 몇 해 전에 종영했고, 나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져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뒤로는 거실 티비를 거의 킨 적도 없고, 가끔 유튜브 클립으로 재밌다는 예능의 일부 장면들만 시청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는 티비 프로그램들도 육아 프로그램 위주였다. 하루 중 나를 위한 시간보다 아이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이런 와중에 과거의 무한도전 회차를 재현한 프로그램이 방영된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내 마음속에 잠들어있던 소녀가 깨어났다.

 오늘 밤에는 아이를 재워놓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시절 나를 웃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야지. 별생각 없이, 걱정 고민 없이, 그저 깔깔 웃고 즐기면서 '누구의 엄마', '몇 반의 선생님'이 아닌 '철없는 나'로 돌아와야지. 그리고 내 안의 소녀에게 인사하며 말해줘야지.
 '너 거기 잘 있었니? 오늘은 밖으로 나와. 걱정하지 말고 복잡해하지 말고 마음 푹 놓고 편하게 놀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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