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지 Jul 01. 2020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기

 나의 아버지는 올해로 예순여섯이시다. 젊은 시절부터 하얗게 피어난 새치로 인해 일찍이 어르신 소리를 듣고 사셨던 아버지가 정말로 어르신의 나이에 접어드셨다. 아버지의 인생은 고단했다. 산골짜기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배움의 뜻을 길게 펼쳐 보지도 못하고 가정의 생계를 위해 소년 시절부터 갖가지 일을 하셔야 했다. 우리 어머니를 만나 어렵사리 가정을 꾸린 후에도 아내와 두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고단함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구멍 난 속옷에 가슴이 저리고 늘어가는 주름에 세월을 실감했지만 나도 어른이 되어 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향 마을에서 소꿉친구로 두터운 정을 쌓았던 친구였다. 아버지끼리도 친분이 있어 우리 부녀는 함께 그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가슴 철렁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자세한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지독히도 거센 삶을 살아온 아버지가 노년의 문턱에서 가슴속에 매서운 폭풍과 파도를 담고 계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자책하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런 아버지에게 병원에서 처방한 몇 알의 약은 얼마간의 위안은 되었을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마음속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복잡한 화학식 아래 탄생한 알약보다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무언가는 태동하는 새로운 생명이었다. 언니의 아들이자 우리 집 첫 손주의 탄생은 아버지의 지치고 외로운 마음을 단번에 달래주는 최고의 명약이었다. 아버지는 손주의 탄생 이후로 더 이상 약을 드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저녁엔 우리 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했다. 첫 손주의 탄생 2년 후 새로이 태어난 두 번째 손주이자 나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제 막 앉기를 시작해 카메라를 보고 세차게 도리질을 하는 아기의 모습을 보다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까르르 웃게 된다. 우리 아버지도 커다란 햇살을 가득 담은 미소로 손주의 재롱을 만끽하셨다. 아직도 부지런히 일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고단했을 하루에 우리 아들이 비타민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면 내게도 벅찬 감동과 기쁨이다. 아버지가 점점 늙어가고 쇠약해지시더라도, 마음만은 더 풍요롭게 해드리고 싶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기, 두 사람의 존재 모두가 나에게 기쁨이고 희망이고 힐링이다. 

작가의 이전글 동트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