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는 파티가 있을 때마다 시詩나 철학서를 낭독하는 문화가 있다.
프랑스에서도 집을 사서 이사하면 집들이를 한다.
남편이 못을 빨리 안 박은 관계로 계속 미뤄진 집들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아이디어를 내셨다. 마침 에두아르의 쉰 살 생일이 다가오니, 친구들과 가족들을 한꺼번에 불러 집들이 겸 생일파티를 하면 고민이 해결되지 않겠냐는 거다. 어머니가 출장 뷔페를 예약하고 지불까지 해주신단다. 셋째 시숙은 와인과 샴페인까지 책임져 준다고 한다. 나는 당일 화병에 꽃을 꽂고 아이들이 마실 음료를 미리 사놓기만 하면 된다. 고민거리가 한꺼번에 사라지니 몸도 마음도 편하다. 반면, 남편은 이제부터 바빠져야 한다.
대가족인 시댁에는 크고 작은 파티가 잦다. 그리고 매번 파티가 있을 때마다 시詩를 낭독하거나 철학서의 한 구절을 낭독한 후, 자신의 생각을 친지들 앞에서 발표한다. 프랑스 대부분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시댁에서만 있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시댁 식구 모두에게 파티의 ‘낭독과 연설’은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보인다.
신혼 초, 나는 이런 시댁 문화가 솔직히 불편했다. 위화감 때문이었다. 한국의 우리 집에서는 가족들이 모였을 때 시를 낭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살아온 문화와 너무도 다른 문화 속에서 나는 과연 편안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남은 평생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며칠 분주했던 남편이 드디어 집들이 겸 생일파티에서 발표할 연설문 작성을 마쳤다. 인용할 글은 파스칼의 <귀족의 신분에 관한 세 담론(Trois discours sur la condition des grands)> 중 첫 번째 담론의 일부라고 한다.
인용문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따위의 단어가 자동적으로 연상된다. 내가 속으로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남편은 발췌한 글의 일부를 읽는다.
당신은 당신 조상의 재산을 물려받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조상이 그 재산을 모으고 보존한 것이 대단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당신의 조상이 축적한 재산이 당신에게 전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합당한 이유에 기반한 법률가들의 판단일 뿐, 무엇도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권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조상들이 그들이 살아있을 때 소유했던 재산을 죽은 후 국가에 환원하기를 원한다 해도, 당신은 불만을 표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소유하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입니다. 법을 만든 사람들이 당신을 가난하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유산을 받을 수 있게 유리한 법이 적용된 것 또한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왠지 집들이에도 생일파티에도 어울리지 않는 글 같다. 남편이 이 글을 인용한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이게 뭐야?’ 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남편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가 파리 근교의 예쁘고 평온한 마을에 제법 괜찮은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나의 경제적 능력 덕이 아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남편에게 물려주신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살아생전 시아버지가 벌어들인 재산을 헤프게 쓰지 않고 6남매를 키워온 시어머니의 알뜰함이 없었다 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남편이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파스칼의 말대로 우연한 것이었다. 혜택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는 ‘우연’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준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아. 그런 거였구나.
파티 당일, 나는 평소와 달리 연설하는 남편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 나란히 섰다. 남편이 연설을 마치고 박수를 받을 때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어머니가 활짝 웃으셨다.
몇 해 전, 바티칸 미술관을 방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남편은 당장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야 한다고 난리였다. 몇 걸음만 나가면 로마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엽서를 보내면 한국 도착까지 한 달이 걸릴지 일 년이 걸릴지 모른다. 한국어를 모르는 남편은 불어로 글씨를 쓰고 나는 그가 쓴 글을 번역해서 그 밑에 조그맣게 썼다.
램프 불빛 아래의 세상은 얼마나 거대한가!
추억 속 세상은 얼마나 작은가!
이곳에는 모든 것이 호사롭고 침착하며, 즐거움과 아름다움, 정연함 뿐.
-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Les Fleurs du mal)》 중에서
보들레르의 시를 급하게 번역하면서, 이 뜬금없는 시가 친정 부모님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이내 걱정하는 내 모습이 왠지 우울하게 느껴졌다. 이질감과 위화감에서 오는 열등감이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 같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바티칸 우체국 우체통에 엽서를 넣으며 나는 차라리 몇 걸음 더 걸어 나가 로마의 우체통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로마에서 엽서를 보내면 엽서가 분실될 가능성도 있으니까.
여행에서 돌아와 친정 엄마와 통화를 했을 때, 엄마는 우리가 보낸 엽서를 읽으며 아빠가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칠십 평생 아빠에게 시를 써서 보내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며 울먹였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어색해할 거라고 오해했던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 모임에서 ‘시 낭독’하는 게 우리 문화가 아니라고 단정 지어 생각하고 위화감을 느꼈던 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문화가 아닌 것이 아니라, 습관이 아니었던 것일 뿐인지도.
2년마다 하는 아틀리에 정기 전시회가 며칠 전에 끝났다. 전시를 앞두고 몇 달간 많이 아파서 꼼짝을 못 하는 바람에 나는 전시 하루 전 늦은 밤까지 유화 물감을 드라이기로 말려가며 작업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갤러리 벽에 걸며 아틀리에 동료들에게 “조심해! 아직 안 말랐어!”를 연발했다. 그 고생을 했지만, 그림이 2년 전 전시 때보다 훨씬 안 팔렸다.
전시 마지막 날, 모두 모여 그림들을 떼어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동료인 마리오딜이 다가와 내 그림을 하나 사고 싶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 그림이 사고 싶었지만 아틀리에 친구인 자기가 사는 것보다 외부 사람이 사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 같아 참았다고 한다. 물감이 마르지 않아 사인도 못하고 전시했던 그림이다. 집에서 사인을 해서 다음 주 목요일 아틀리에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친구 마리오딜에게 사인만 덜렁 해서 줄 것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다. 우정을 떠올릴 만한 뭔가를.
우정과 관련된 좋은 시나 글귀가 없을까 책장을 오가며 고민하는데, 몇 해 전 읽었던 단편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정이현의 단편 <영영, 여름>. 프랑스어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라 내가 직접 번역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단 한 사람을 위한 번역만큼 큰 선물도 없을 것 같다.
마리오딜이 산 그림을 작은 종이 위에 수채화로 다시 그렸다. 그리고 그 뒤에 정이현의 글을 번역해서 옮길 생각이다.
창고로 쓰는 작은 방에서 종이상자 몇 개를 찾아냈다. 이사 올 때 쓰고 업체가 회수해가지 않은 상자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작은 상자를 들고 내 방으로 왔다, 나는 텅 빈 상자 안을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봤다. ‘Fragile’이라고 인쇄된 붉은 스티커를 떼어내고, 남아 있는 접착제 자국을 칼로 살살 긁어냈다. 경고의 글자가 사라지자 그것은 아주 평범한 누런색 종이박스가 되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에 두었던 목걸이를 꺼내어 색종이에 곱게 싸서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별 모양으로 커팅된, 엄마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엄마가 찾던 목걸이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무래도 변하지 않은 것, 사라지지 않은 것을 단 하나쯤 나도 가지고 싶었다. 편지는 영어로 썼다. 고마웠어, 메이. 우리 또 만나, 꼭. 박스를 테이프로 단단히 봉했다. 옆구리에 끼고 택시를 불렀다.
메이의 아파트가 어딘지만 알 뿐 정확한 동호수는 몰랐다. 그곳은 우리 집보다 더 비싸 보이고 경비가 삼엄해 보이는 단지였다. (중략) 나는 오피스를 찾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가 전학을 갔는데 선물을 주지 못했어요. 이걸 꼭 전달해야 해요. 오피스에 근무하는 남자는 내게 북한 국적의 사람들이 사는 주소를 말해줄 수는 없지만 선물 상자를 전해줄 수는 있다고 했다. K의 시민들은 대게 다 친절하고 선량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진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K에서 몇 계절이 지나도록 이곳은 한여름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영 여름일 터였다. (중략) 부서지기 쉬운 것들, 부서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중략) 침묵만이 남은 미래에서 나는 암흑과 뒤섞일 때까지 앉아 있었다.
- 정이현 <영영, 여름> 중에서
번역을 하며 읽자, 작가의 말이 더 잘 들려오는 것 같다. ‘Fragile’이라는 스티커를 떼어낸 종이박스는 더 이상 취급주의가 필요 없는 평범한 상자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우정과 함께 들어간다. 번역을 마친 글을 직접 만든 엽서 뒤에 옮겨 쓰고 한국에서 가져온 훈민정음이 인쇄된 한지에 그림과 함께 포장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난다. 시詩집살이 7년 차 내 모습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